그림책으로 읽는 한나 아렌트의 철학 이야기
한나 아렌트는 21세기의 한국에서 읽히는 가장 ‘핫’한 정치철학자 중 한 명이다. 특히 ‘악의 평범성’이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누구나 들어보았을 법한 개념으로, 그의 이론은 현재의 대학·언론·정치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작은 극장』은 마리옹 뮐러 콜라의 흥미로운 스토리텔링과 클레멍스 폴레의 개성 있는 그림을 통해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쉽고 재미있게 담고 있다. 그리하여 다소 어려울 수 있는 한나 아렌트의 사상과 철학에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일반 독자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철학을 통해 인간과 삶,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고민하고 배운다. 어렵고 딱딱하다는 인식이 강한 탓에 많은 사람들이 철학 서가에 다가가기를 꺼리지만, 사실 철학은 어떤 학문보다 ‘나’와 ‘삶’의 가까이에 있으며 언제든지 ‘사유’를 통해 다가갈 수 있다. 이 책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책에 손을 뻗은 독자들이 한나 아렌트의 철학에 쉽게 입문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사의 극장에서 펼쳐지는 두 한나의 모험
예순아홉 살의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마지막 저서가 될 『정신의 삶』 집필에 매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환영처럼 한 소녀가 나타난다. 아이의 이름도 한나. 호기심 많은 어린 한나는 어른 한나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어른 한나는 소녀를 무시하고 책 마무리에 몰두하려고 한다. 하지만 소녀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얘야, 나는 써야 하는 책이 있어.”
“책이요?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건 이야기책이 아니야. 이건… 말들의 의미에 관한 책이야.”
“그럼 당신이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인가요?”
말을 만든다는 표현에 언짢아진 한나 아렌트는 소녀의 말을 곱씹어보며 생각한다.
“나는 땅 위에서 생각하는 현실의 사상가지, 땅속에서 생각하는 이론적인 사상가가 아냐!”
고집스럽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는 어린 한나를 데리고 어른 한나는 인간사의 무대가 펼쳐지는 작은 극장으로 향한다.
“말하는 것은 곧 행위하는 것이어야 해. 말을 위한 말은 그저 실없는 소리나 거짓말에 지나지 않아.”
수백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한나의 손에 의해 연극의 막이 오르고, 두 한나는 무대 위에 펼쳐진 고대 그리스 아고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만난다. 사람들은 정치적 삶의 무대인 아고라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곧 무대 뒤의 사적 영역과 무대 위 공적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모두 책임질 통치자를 세워 생각을 위임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사유할 수 있는 자유인이 줄어들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한마디를 내뱉고 무너져 내린다.
“권력은 그 사람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악을 또 다시 물리칠 수 있나요?
폐허가 된 무대 위에 나무가 자라 두 한나는 빽빽한 숲의 포로가 된다.
‘만약 새로운 민중의 통치자가 늑대를 길들이는 대신에 자유롭게 놓아주었다면? 도시가 숲이 되어버린 것도 놀랍지는 않아.’
두 한나는 늑대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땅속에 숨어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사상가 늙은 여우의 도움도 뒤로한 채 두 한나는 빽빽한 식물을 헤치며 인간사의 무대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무대에서 새로이 발견한 것은 꼭두각시. 모두 같은 모습으로 같은 라벨을 붙이고 팔과 다리가 나무가 되어감에도 그들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나무 혀와 머리로는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어. 생각이 없다는 건 나쁜 마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위험해…….”
마침내 두 한나는 꼭두각시를 조종하던 관료를 잡아 재판에 넘겼지만 관료는 항변한다.
“나는 법을 따랐을 뿐이야.”
미리 준비된 서류의 언어 외에 자신의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관료를 보고 어른 한나는 소름 끼치는 ‘진부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무인간을 어떻게 재판할지 걱정하는 어린 한나에게 말한다.
“재판은 재판을 받는 사람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기도 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건 그 사람들로 하여금 식상한 말들을 잊어버리도록 하는 거야. 말들이 올바를 때, 그것은 말하기를 넘어 행위가 돼.”
말들이 의미를 회복함에 따라 나무들이 하나씩 쓰러지고, 어느새 숲은 사라진다. 언제나 악이 도사리고 있는 인간사의 극장에서 두 한나는 안주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 세상을 또 다른 방향으로 바꾸고, 사유의 확장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도 한나들의 작은 극장처럼 또다시 악을 물리칠 수 있을까?
미래를 만들어갈 고집 세고 매력적인 아이들을 위하여
나무 이끼가 남은 무대 위에 남겨진 어린 한나는 어른 한나에게 묻는다. “지구가 내일도 살 만한 곳일까요?” 그리고 어른 한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나는 예측 불가능성을 믿어.”
사유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고 현재를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존재다. 새로이 태어나 이 세계로 왔고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사유와 행동을 한다. 이 책은 현재에 변화를 만들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예측불가능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작은 극장’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이 책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말과 행위’, ‘생각 없음’, ‘진부함’, ‘권력의 위임’, ‘식상한 말’, ‘사유하는 자유인’ 등 한나 아렌트의 철학 개념들을 곳곳에 펼쳐놓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상을 쉽게 따라가 볼 수 있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