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과 기후위기의 시대, 패션은 어디에 서 있을까
패션이 오늘날 추구하는 가치와 앞으로 펼칠 가능성에 대하여.
▶ 패션으로 시작하는 유의미한 대화
우리는 매일 옷을 입고 머리를 손질하며 액세서리를 고른다. 계절에 따라, 유행에 맞춰, 때로는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패션을 활용한다. 패션은 유행을 의미하지만 단순히 유행에 그치지 않는다. 패션은 우리의 사고방식, 시대정신, 규범 등이 뒤섞인 정치적 행위이며, 사회‧경제‧윤리적 영역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업이기도 하다. 『패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접근성이 높은 ‘패션’을 사회적 관점으로 분석하고 바라본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패션을 계기로 다양한 사회적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쉽게 끌 수 있는 패션과 함께라면, 사회문제를 다루는 무거운 이야기도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인종, 체형, 나이, 장애, 여성, 퀴어, 문화 다양성, 환경, 자본주의 등 이 책은 패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노인은 패션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가? 장애인은 패션을 온전히 누리고 있는가? 여성복과 남성복은 구분될 수 있는가? 재활용 의류는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 책은 패션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동시에,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패션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 패션을 사랑하는 소비자와 디자이너, 브랜드는 그 변화에 어떻게 기여할지를 고민한다.
▶ 다양성의 시대, 패션은 모두가 누리고 있는가?
패션은 ‘아름다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그 미적 기준은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을 반영해왔다. 계급, 자본, 인종, 나이, 성별, 장애, 신체 사이즈 등 여러 측면에서 우위에 있는 존재가 곧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은 패션 산업에서도 오랫동안 외면받아 왔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는 다양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이를 반영하려는 시도 또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패션은 이 변화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패션 산업 전반에 걸쳐 다양성과 관련된 흐름을 짚어본다. 예를 들어 ‘패션과 인종’ 챕터에서는 패션 업계가 유색 인종을 다루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살핀다. 패션 잡지나 이미지에 흑인이나 아시아인이 등장하더라도 백인의 미적 기준에 가까운 외모가 많고, 국내 다수의 브랜드도 여전히 백인모델을 선호한다. 이는 사회가 백인 중심의 미의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체화했음을 드러낸다. 또한, 런웨이에 소수의 유색 인종 모델을 등장시키는 것만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실현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도 짚는다. 이는 인종 문제를 구조적 불평등의 맥락으로 살피지 않고, 단순히 가시성의 문제로 축소하는 접근이다. 저자는 패션계에 진정성 있는 고민과 실천을 요구한다.
▶ 기후위기의 시대, 패션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지속가능성은 현재 가장 중요한 사회과제 중 하나이며, 패션은 이 주제에 반드시 응답해야만 한다. 패션의 화려한 외양 뒤에는 노동 착취, 환경 파괴, 과소비 문제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패스트패션의 등장 이후 옷은 점점 더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며, 그만큼 빠르게 버려진다.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생산 구조는 개발도상국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고, 쏟아지는 의류 폐기물은 생태계에 심각한 부담을 안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로 바라본다. 패션 시스템의 파괴적인 특성이 과잉, 인간중심주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기반 위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많은 패션 브랜드에서 시도하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대안 ‘업사이클링’에 주목한다. 업사이클링은 쓰레기에 새로운 디자인과 가치를 부여해 제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식이나, 저자는 묻는다. 업사이클링은 과연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업사이클링은 수작업 기반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대량 폐기와 속도 경쟁에 기반한 현재의 패션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기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물건의 수명을 늘리고 소비를 늦추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한 제품’ 몇 개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기업이 책임을 면하는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패션 산업의 진정한 전환을 위해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 패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 사회와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위기 앞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기일수록 문제를 지나치게 크고 무겁게 인식하기보다 가볍게 접근해보면 어떨까. 다수의 작고 일상적인 실천이 모일 때, 예상치 못한 변화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패션을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패션 액티비즘’이 그 예이다. 패션 액티비즘에는 쇼핑을 줄이고 옷장 안의 옷을 더 오래 입으려고 노력하거나, 중고 거래를 시도하고, 직접 수선해보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운동도 포함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신이 정치나 사회운동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게 만든다. 패션의 일상성은 높은 문턱 없이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며, 무력감 속에서도 변화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는 패션이 그런 ‘최소한의 실천’에서 출발해 더 큰 변화를 위한 물꼬를 틀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일상과 관심이 곧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