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시인 등단 40주년 기념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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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바다는,
당신의 가슴속 고래는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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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니면 누가 바다에 꽃이 지는 걸 보겠으며, 누가 고래가 꽃으로
피는 걸 알아채겠는가. 이미지로 세계를 재생산하는 이 맹목적인 사랑
의 고투가 40년에 이르렀다니 조아리며 경하할 일이다.
_안도현 시인(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고래는 나의 친구였다.”
시인에게 시를 선사한 세상의 모든 고래에게 바치는 ‘고래 시집’
‘고래 시인’ 정일근이 등단 40주년을 기념하며 오직 고래에 대해 쓴 시를 모은 ‘고래 시선집’을 출간한다. 정일근 시인은 1984년 『실천문학』에 7편의 시를 발표하고,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로 등단하였다. 1987년 첫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을 펴낸 이래 열네 권의 시집을 출간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이번 고래 시선집 『꽃 지는 바다, 꽃 피는 고래』에는 시인이 그간 ‘고래’를 소재로 써내려간 작품과 새롭게 쓴 고래 시 10여 편을 더해 45편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더불어 시인이 고래를 대변하는 ‘고래 대사’로 살아오면서 쓴 고래 칼럼과 〈조선일보〉 오태진 수석논설위원의 인터뷰도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고래’는 40년 시인 생활 동안 시인을 계속해서 따라다닌 존재이다. 정일근 시인은 자신에게 시를 선사한 고래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아 이 시선집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장생포 김 씨」부터 「고래란 소리가 올 때」까지,
시인에게 고래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하는 소리’였고,
‘결국 나를 펑펑 울게 하는 소리’였다.
정일근 시인의 ‘고래 시’는 이미 그의 첫 시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상업적인 고래잡이가 중단된 1986년 직전 막 등단한 ‘젊은 시인’은 장생포항을 떠나는 마지막 포경선의 출항을 직접 보았다. 그날의 기억을 1987년 출간된 첫 번째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 「장생포 김씨」라는 제목의 시로 남겼다.
마지막 고래잡이배를 동해로 떠나보내며/해부장 김 씨는 눈물을 보인다
(…)
이제 마지막 배가 돌아오면/장생포여, 고래잡이는 끝나고/밤새워 고래의 배를 가르며 듣던/눈을 감고 환히 찾아갈 수 있는 김 씨의 고향/청진항 이야기는 끝나리라//
_「장생포 김 씨」 중에서
이후 세상에 내놓는 시집에는 늘 고래에 관한 시가 있었다. 시인의 시에서 고래는 사랑하는 이가 되었다가, 어머니가 되었다가, 어린 시절 떠나보낸 아버지가 된다. 먼바다에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리는 일’에서 ‘너를 기다렸던 일’을 떠올리고(「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어미 고래의 자궁을 열고 나오는 새끼 고래의 모습에서 ‘아비’를 찾던 열 살의 소년을 기억한다(「고래, 孤來」). 고래는 인생의 무게에 지친 육신과 영혼이 부활을 꿈꾸는 대상이며(「바다에서 나는 부활한다」), 망망대해 위로 거대한 몸을 밀어 올리는 혹등고래의 몸짓에서 ‘피가 나도록 고통스러운 시를 쓰’던 시인의 나날을 떠올리게도 한다(「고통, 고래」).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너를 기다렸던 일/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_「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고래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의 고투 40년,
우리가 사랑하고, 죽이고, 먹어온 그 고래에게로 인도하다
일간지 울산 주재 기자로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기사를 쓰다가 고래에 관심을 갖게 된 시인은 수천 년 전부터 고래가 인간과 함께했음을 보여주는 암각화 앞에서 죄스러움을 느꼈다. 이후 시인은 불법 포경 반대 1인 시위, 삭발 시위, 해상 시위 등을 펼쳤고 고래 목측(目測)선을 타고 목측조사에도 참여했다. 5천 마리는 족히 되는 돌고래의 군무를 본 날도 있다.
1998년 전업 시인이 된 이후 울산에 집필실을 마련한 시인은 시를 쓰며 고래를 지켰다.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2005년 개최된 국제포경위원회(IWC) 총회에 맞춰 여러 시인에게 고래 시를 받아 한영시집을 발간했다. 사라지는 고래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작된 관심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 고래는 시인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번 시선집의 표지 그림은 이청초 화가의 작품으로, 혹등고래가 몸 전체를 물 밖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수면으로 떨어지는 동작 ‘브리칭(breaching, 고래 뛰기)’을 표현한 그림이다. 시인은 그림의 고래를 상자 속에 가두지 말 것을 요청했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은 고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가 눈앞에서 멸종을 목격한 생물종인 고래,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가 함께 보호하기로 약속한 동물이기도 하다. 시인은 절멸의 위기에 처한 고래에게 사죄와 화해의 손을 내밀며(「고래의 손」), 사라진 귀신고래가 돌아오는 날 ‘한 마리 푸른 고래가 되어’ 북녘땅 청진항까지 내달리는 것을 꿈꾼다(「장생포에서 청진까지」). 고래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의 고투 40년, 시인은 이제 우리를 고래의 세계로 초청한다. 이제 당신의 바다에서 당신의 고래를 찾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