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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강남은

잊혀 가는 옛 강남의 흔적을 찾아서


  • ISBN-13
    979-11-6861-470-3 (03300)
  • 출판사 / 임프린트
    산지니 / 산지니
  • 정가
    20,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5-06-05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강대호
  • 번역
    -
  • 메인주제어
    사회학 및 인류학
  • 추가주제어
    사회, 문화: 일반 , 사회학 , 인문지리학 , 에세이, 문학에세이 , 르포, 기사, 칼럼 저작집
  • 키워드
    #에세이, 문학에세이 #사회, 문화: 일반 #사회학 #강남 #고향 #인문에세이 #사회학 및 인류학 #인문지리학 #르포, 기사, 칼럼 저작집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8 * 210 mm, 272 Page

책소개

나의 살던 고향은, 

논과 밭 그리고 아파트가 함께 공존하던 ‘강남’이었다.

 

수유리와 서교동을 거쳐 마침내 역삼동 개나리아파트까지!

서울 토박이 도시탐험가의 

‘당신이 몰랐던 진짜 강남 이야기’

 

 

가장 젊은 서울, 강남

한강 이남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를 압축한 고유명사가 되다

서울의 자치구 중에서 가장 최근에 서울로 편입이 된 지역은 강남구와 서초구이다.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했던 두 지역은 1963년 1월 1일부로 서울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는 서울이 된 지 60년이 갓 지난, 서울에서 가장 젊은 동네인 것이다. 지리적으로 한강 남쪽을 의미했던 강남은 언제부터인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끝 모르고 올라가는 초고가의 부동산과 성공적 입시를 보장하는 교육환경을 상징하는 개념으로서의 고유명사 ‘강남’이 한국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강남’은 가장 늦게 서울이 되었지만, 그 어느 지역보다도 서울을 대표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현재를 압축해놓은 공간이자 현상이 되었다. 

저자는 본적은 경북 상주이지만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이다. 수유리와 마포구 서교동을 거쳐 국민학교 2학년이 된 1976년, 강남구 역삼동에 새롭게 지어진 개나리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강남 주민이 되었다. 군 입대 무렵까지 강남에 살면서 강남 개발 초기인 1970년대와 급격히 팽창해나가던 80년대를 직접 목격하였다. 

어린 시절 살던 수유리 옛집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도시 탐사의 재미를 느낀 저자는 강남, 그리고 서울 각 지역으로 범위를 넓혀 지역의 변화 과정을 탐사하고 연구해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도시탐험가가 되었다. 『나의 살던 강남은』은 저자가 학창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1970년대부터 80년대의 강남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이다. 저자가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강남의 이야기와 도시탐험가가 되어 직접 발로 뛰어 발굴해낸 옛 강남의 흔적들은 오늘날 강남의 화려함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그 시절의 강남의 모습을 되살린다.

 

강남의 주인은 누구일까

중심부에서 내던져진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강남의 전통마을들

한강 이남의 농촌 지역이었던 강남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강남’이 되었을까. 그리고 강남이 개발되는 시기에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저자는 강남의 개발 과정과 함께 강남 개발 이전부터 있었던 전통마을들과 그 흔적을 소개한다. 농촌이었던 강남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 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영향이었다. 1967년경부터 지금의 서초구를 지나는 경부고속도로 구간 주변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년 발표된 ‘남서울 개발계획’에 따라 서울 강북 주요 기관과 인구가 분산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개발을 독려한 정부의 관심을 힘입어 강남은 더욱 팽창되었고, 한적한 논밭이었던 논현동과 반포동 일대는 빽빽한 주택가가 되어 갔다. 1972년 제정된 법률에 따라 ‘주택 건설 촉진 지구’나 ‘재개발 촉진 지구’에 지정되면 다양한 특혜가 있었다. 부동산 관련 세금을 면제 혹은 돌려주기까지 했다. 1976년 도입된 ‘아파트지구’ 제도는 강남 3구 일대와 한강 벨트에 많은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는 데 일조했다. 

아파트 단지가 늘어나던 1970년대와 80년대, 강남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이주민들이 정착해 살던 마을들이 있었다. 헌인마을은 국립 부평나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던 음성나환자들과 가족들이 1963년부터 내곡동에 정착해 형성된 마을이다. 헌인마을의 이웃동네 신흥마을은 광복과 한국전쟁 후 월남한 사람들이 정착한 마을이고, 샘마을은 창덕궁과 창경궁 담장 옆에 늘어서 있던 무허가 주택의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형성된 동네이다. 강남은 서울 중심부로부터 내던져진 이방인들이 어쩔 수 없이 정착해야 했던 땅이었다. 내몰린 자들의 터전이었던 강남이 이제는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본과 인력이 집중되는 장이 되었다. 강남의 전통마을에는 이제 더 이상 나환자도, 월남민도, 철거민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저자는 강남의 전통마을에 희미하게 남겨진 흔적들을 기록하며 강남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한다.

 

그래서 샘마을에 던져진 철거민들은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의 권리를 외지인에게 팔아버리고 떠나지 않았을까, 이런 짐작을 해본다. 오늘날 샘마을 일대를 돌아보면 여느 교외의 고급 주택가처럼 보인다. 한때 철거민이 와서 살았던 동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 샘마을은 물론이고 인근의 신흥마을과 헌인마을은 중심부로부터 내던져진 이방인들이 어쩔 수 없이 정착해야 했던 강남땅의 역사를 목격해 온 증인인 거 같다. 그나마도 그러했던 과거와 흔적이 희석되고 있지만. p.156-157 「내몰린 자들의 터전이었던 강남」 중에서

 

세상에, 강남에 이런 일이

토막민과 소도둑, 그리고 어쩌면 최초의 고독사

살아있는 유기체 강남은 오늘도 변화하고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1970년대~80년대의 강남 이야기는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1976년 12월 역삼동의 개나리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저자는 아파트 주변의 황량한 공터를 지나다 구덩이를 가마니로 덮은 움막과 그곳에서 나오던 아이를 발견한다.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그날의 기억은 도시 탐사를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도시 빈민인 토막민과 토막집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되살아났다. 움막 가족은 강남 개발에 떠밀려 또 어디로 거처를 옮겼을까. 또한 1983년 강남구 역삼동의 한 아파트에서 사망한 지 열흘 만에 발견된 60대 남성의 죽음을 떠올리며 어쩌면 최초로 한국 언론에 알려진 고독사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너무 만연해져버린 고독사, 그 쓸쓸한 죽음이 시작된 곳도 역시 강남이었다. 

서울의 중심부와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이었던 강남에서는 소를 훔쳐 밀도살하는 사건도 자주 발생했다. 1970~80년대 강남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든 청소년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한 야학도 역삼동 지역에 있었다고 전한다. 강남 요지의 지주들이 ‘공한지세(空閑地稅)’를 피하기 위해 지었던 대형 식당들, 테헤란로 일대를 가득 메웠던 모텔들, 1985년 이후 생겨난 동아극장, 씨네하우스, 브로드웨이극장 등 개봉관들 등 그 시절 강남을 추억할 수 있는 저자의 경험들을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자본과 성장제일주의 대한민국 사회를 압축해놓은 하나의 현상이 된 ‘강남’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아파트와 빌딩숲 사이 구석구석에는 기록되어야 할 옛 모습이 아직 남아 있다. 저자가 50대에 도시탐험가가 되어 유년시절을 보낸 마음의 고향 강남을 다시 탐사하며 찾아낸 또 다른 강남의 얼굴을 『나의 살던 강남은』에서 만나보길 바란다.

목차

들어가는 글: 도시탐험가의 고향 이야기

 

1부 나의 살던 강남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신다면

서울 토박이, 강남 토박이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시내버스

도곡동에 없는 도곡초등학교

말죽거리의 중학교에 모인 도시 아이들과 농촌 아이들

그 시절 아파트 집들이의 필수 코스

어머니는 왜 아파트 화단에 김칫독을 묻었나

그 많던 피아노 학원은 왜 사라졌을까

담배 이름이 아파트 이름이 된 사연

 

2부 당신이 몰랐던 강남 이야기

경기도민, 하루아침에 서울특별시민이 되다

강남의 탄생

원조 강남 영등포

잠실은 한강의 섬이었다

강남을 가르는 경계선들 

강남에 남은 전통 마을의 흔적

교통의 요지 말죽거리

‘흐능날’을 아시나요

강남의 국민학생들은 왜 등교를 거부했나

내몰린 자들의 터전이었던 강남

서울의 낙도, 강남

한강의 교량 이전에 나루터가 있었다 

강남의 서울시립 공동묘지

 

3부 강남에 이런 일이

한밤의 소도둑 추격전 

강남의 토막집과 토막민 

기러기집과 야학의 아이들 

어쩌면 최초의 고독사 

어느 넝마주이의 죽음 

보호수 실종 사건과 독극물 테러 사건 

갈빗집과 가든의 상관관계 

강남 유흥가의 시작은? 

재개봉관의 추억 

강남에는 왜 대형교회가 많을까 

강남 랜드마크의 변화 

개나리아파트와 영동아파트는 사라졌지만 

 

나가는 글: 인생의 변곡점

본문인용

pp.51-52 그 일은 식사 후 벌어졌다. 차례대로 화장실에 들어간 이모와 사촌들은 한결같이 눈이 동그라진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온수 꼭지를 돌리자마자 더운물이 나왔으니 말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지만 당시로서는 놀라운 장관이었다. 한국 가정집에서 더운물은 거저 구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우리 가족도 수유리나 서교동에 살 때는 머리를 감거나 혹은 한겨울에나 더운물을 쓸 수 있었다. 그것도 큰 솥에다 데워서. 그래도 서교동 집은 부엌에 수돗물이 나왔으니 멀리 옮겨야 하는 수고는 없었다.

하지만 장위동에 사는 이모네는 사정이 좀 달랐다. 1979년 6월 한 신문에 장위동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기사 제목부터 상수도 설치가 되어 있지 않다고 표현할 정도로 장위동은 생활 기반 시설이 열악했다. 장위동뿐 아니라 1970년대 후반 서울에는 펌프로 지하수를 퍼 올려야 하는 집이 많았다. 이모네 마당에도 작두펌프가 있었다.

더운물을 쓴다는 건, 마당에서 펌프로 물을 길어 부엌으로 옮긴 다음 아궁이 위 솥에다 붓고 끓인 후 찬물과 섞어 쓴다는 걸 의미했다. 이렇듯 더운물은 누군가의 노고가 들어간 노동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온수 꼭지를 돌리자마자 더운물이 콸콸 쏟아지다니. 이모네에게는 기적과 다름없었다. 그날 이모네 가족은 우리 집에서 목욕을 했다. 샤워가 아니라 욕조에 더운물을 받아 몸을 담근 다음 때를 불린 후 이태리타월로 온몸 구석구석 미는 그런 목욕. 욕조에 모두 함께 들어갈 수 없어서 1차로 첫째와 둘째 사촌이 먼저 목욕한 후 2차로 이모와 막내 사촌이 목욕했다.

_「그 시절 아파트 집들이의 필수 코스」

 

p.91  그런데 강남은 원래 한강 남쪽을 의미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이 되었다. 강남은 국가 권력이 개입된 도시개발과 교육환경 덕분에 특별한 지역이 되었다. 이들 지역에 상대적 부유층 혹은 특권층이 거주하게 되면서 경제 규모 상승에 따른 투자와 정책적 배려도 집중되었다. 다른 지역과 격차를 크게 벌리게 된 이유다.

그래서일까. 보통명사인 강남은 언제부터인가 고유명사가 되어 있었다. 한강의 남쪽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보다는 고액 부동산이나 좋은 교육환경을 상징하는 개념으로서 고유명사 ‘강남’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유명사 강남이 상징하는 이미지는 후발 신도시들이 닮고 싶어 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제2의 강남’ 같은 슬로건을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쉬이 볼 수 있다.

_「강남의 탄생」

 

p.173  그즈음 5학년이 된 나는 개포동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영동아파트에 사는 어느 6학년 형이 예전에 자기네 가족이 살던 동네 근처에 폐쇄된 공동묘지가 있고 아직도 구덩이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 동네가 개포동이었다. 왜 그랬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형과 나 그리고 몇몇 아이가 공동묘지 흔적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당시에는 역삼동에서 개포동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 걸어가기로 했다. 지금의 한티역과 도곡역 사이의 고갯길을 넘어가니 비닐하우스로 가득한 벌판이 보였다. 도곡동이었다. 오늘날 타워팰리스가 있는 바로 그 자리. 거기에서 개포동으로 가려면 양재천까지 간 다음 다리를 건너야 했다. 농경지 사이 진흙 길을 한참 걸어 양재천까지 갔다.

하지만 길을 잘못 택했는지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지쳤던 우리는 탐험 의지를 꺾고는 되돌아왔다. 개포동에 있었다던 공동묘지는 그렇게 기억 서랍 속 깊은 어딘가에 묻혀버렸다. 긴 시간이 흘러 난 강남의 옛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어른이 되었다.

_「강남의 서울 시립 공동묘지」

 

pp.225-226 그런데 강남 요지에 큰 땅을 소유했던 지주들은 왜 자기 땅을 개발하지 않고 남에게 임대했을까? 이들 지주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1980년대에 강남 일대의 빈 땅은 ‘공한지세(空閑地稅)’라는 세금을 물어야 했다. 그것도 아주 무겁게. 그래서 강남의 지주들은 세금을 물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 땅에다 뭔가를 해야 했다. 공한지세는 건축이 가능한 땅인데도 놀고 있으면 부과한 지방세다. 즉 토지를 건축 목적이 아닌 투기의 대상으로, 그러니까 땅값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며 막연히 소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세금이었다.

강남 일대에 땅을 소유한 지주들은 발등에 불 떨어진 느낌이 아니었을까. 땅값이 기대만큼 오르는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돈을 끌어들여 건물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책이 있었다. 요식업자들에게 땅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땅을 빌린 요식업자들은 그 터에 식당 건물을 지었다. 삼원가든처럼. 결국은 이러한 이유로 강남 일대에 대형 식당이 늘어나는 모양새가 되었다.

_「갈빗집과 가든의 상관관계」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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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강대호
가족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본적인 경상도가 아닌, 나고 자란 서울의 수유리와 서교동, 그리고 강남이 고향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게 고향을 탐구하는 마음이 도시 관련 글을 쓰도록 이끌었다.
대학에서 음악을, 대학원에선 IT 정책을 공부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벤처회사 등 20여 년 여러 분야에서 일하며 다양한 주제의 세상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2018년 『월간문학』 수필 부문에서 신인작품상을 받은 후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대, 문화, 도시를 아우르는 주제의 연재로 <오마이뉴스>의 뉴스게릴라 상을 두 차례 받았고, 2020년에는 ‘2월 22일상’을 수상했다. 현재 여러 언론 매체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글을 기고하고, 라디오 방송에 게스트로도 출연하고 있다.
제2회 ‘현북스 천천히 읽는 책’ 공모전에서 심사위원 추천작으로 뽑힌 『슬렁 씨의 도시탐험: 서울 강남』이 첫 책이다. 글쓰기를 위해 자료를 찾고 취재하는 모든 순간이 즐겁다. 글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여전히 신기하기만 하다. 앞으로 다양한 주제의 책이 나올 예정이다.
'산지니'는 가장 높이 날고 가장 오래 버티는 우리나라의 전통 매입니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출판 환경과 지역출판의 여건 속에서 오래 버티고자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이 함께 이루어질수 있어야 합니다. 산지니의 책들이 나와 공동체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본주의사회의 여러 중독에서 해방되어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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