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숲에서 잠을 자던 아이가 배고픔에 못 이겨 잠에서 깨었다. 하기야 어미의 젖을 빤 지도 한참 지났으니 허기가 몰려올 시간이었다. 아이가 막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릴 때였다. 숲에서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내려와 아이의 옆에 눕더니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아이는 며칠을 굶은 것처럼 호랑이 젖을 빨았다. 아이가 젖을 빨고 있는 동안 호랑이는 마치 제 자식에게 젖을 물리는 것처럼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호랑이 젖을 빨던 아이가 배가 부른지 젖을 입에서 떼었다.(16쪽)
공산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이 전투를 계기로 후삼국의 주도권은 확실히 후백제에 돌아간다. 신라를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든 동시에 영토 역시 신라 9주 중 6주에 이르러서 최대 판도를 이룬다. 구체적으로는 전주(전북), 무주(광주 전남), 강주(경남 서부), 웅주(충남 충북 일부), 양주(경남 동부)의 일부이다. 한편 신라는 서라벌과 양주의 일부만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고, 고려는 변두리 한주(경기도와 황해도), 삭주(영서 지방) 두 주만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땅만 넓지 산지가 많고 경제력이 좋지 않은 지역이었다. 한편 명주(영동 지방)는 독립 세력이었던 김순식이 점유하고 있었다. 견훤은 이 무렵 오랫동안 눈엣가시였던 금성(나주) 점령에도 성공한다.(272~273쪽)
왕건은 말을 타고 달려와 개태사에서 죽은 견훤을 확인하고, 불교 의식으로 장례를 준비하고 모든 대소신료에게 궁에도 분향소를 차려놓고 조의를 하라 명하였다. 왕건이 이만큼 견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삼국이 통일되었으나 아직 후백제의 호족들이 고려에 충성하는 것을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옛날의 백제가 신라에 망하더니 이번에는 후백제가 고려에 망하여 후백제의 호족들은 나라가 두 번이나 망하는 것을 두고 고려에 곱잖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두 왕자는 변방으로 유배 보냈고, 후백제의 폐하인 신검은 도성에 초라한 벼슬을 주고 유배보다 더한 감시를 하고 있으니, 후백제의 호족들은 언제든 수틀리면 들고 일어날 기세였다. 이 때문에 왕건은 견훤의 죽음을 접하고 친히 조문을 온 것이다.
견훤의 죽음 역시 일흔의 나이에 죽어서 호상이라 여기고 장례가 아자개의 장례처럼 성대하고 즐겁게 치러졌다. 사찰 내에서는 육식을 금하므로 개태사 밖의 공터에 임시로 움막을 짓고 많은 호족과 문상객들이 거나하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견훤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견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개태사에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밤낮없이 잔칫집처럼 가무가 끊이지 않았다. (405~4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