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 ‘3분 소설’ 중에서
“가까이 오라.”
주상전하의 윤음을 들은 유모 홍씨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대군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나 세상에 나온 지 반년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비구니가 됐으니 임금의 손자라 해도 갓난 아기씨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광평대군의 노비 조두대는 안타까운 눈으로 유모의 품에 안긴 아기씨를 바라보았다. 세종이 광평대군의 집을 자주 찾았기에 조두대는 주상 전하의 용안을 몇 번 뵌 적이 있었으나 경복궁에서는 처음이었다. 좋은 일로 부름을 받았다면 곁눈질을 해서라도 대궐 구경을 할 텐데 온통 슬픔으로 가득한 분위기라 고개를 움직일 겨를도 없었다.
“아기씨가 지낼 처소를 준비할 것이니 너희는 궁에 남아 아기씨를 보살피도록 하여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유모 홍씨와 조두대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기씨에게 꼭 필요한 유모 홍씨와 달리 다른 곳으로 보내지거나 팔려갈까 싶어 초조했던 조두대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배려에 그야말로 성은이 망극했다. 노비에 불과한 자신이 이제부터 대궐에서 먹고 자며 살게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p11. ‘노비 조씨, 궁녀로 발탁되다’ 중에서
영순군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늦가을 무렵 천연두를 앓기 시작한 광평대군이 해를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남편을 잃은 광평대군의 부인 신씨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이때 영순군은 태어난 지 겨우 6개월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기였다. 주인을 잃은 조두대는 유모 홍씨와 함께 갓난 영순군을 보살폈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얼마 후 영순군을 대궐로 부른 세종의 명에 따라 조두대는 유모 홍씨와 함께 궁에서 생활하게 됐다. 정식 궁녀로 선발되진 않았지만 왕실의 특별한 상황에 따른 일종의 특채였다.
p23. ‘세조의 불경 간행에 동참하고 궁체를 창시하다’ 중에서
세조는 세조 5년(1459)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과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월인석보》를 간행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수양대군 시절, 세조가 세종의 명을 받고 제작한 한글 불서였으니 왕위에 오른 후 간행한 《월인석보》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간경도감에서 최초로 한글 번역된 불경은 세조의 친필로 간행된 《능엄경》7)이다. 세조는 능엄경 발문에서 번역 과정을 상세히 밝히며 동참했던 사람의 이름을 모두 언급했는데 그중엔 조두대의 이름도 있었다.
상(세조)이 한문에 토를 달고 혜각존자 신미대사가 토를 단 문장을 확인하면, 수빈 한씨(세조의 맏며느리, 훗날 인수대비)가 소리내어 읽으며 교정하고 한계희, 김수온이 그것을 들으며 번역하여 적는다. 박건, 윤필상, 노사신, 정효상 등이 번역된 문장을 서로 고찰해보고 영순군(광평대군의 아들)이 예(例)를 정하며, 조변안과 조지가 한자에 동국정운에 따른 운을 적고 신미와 사지, 학열, 학조 스님이 잘못 된 번역을 고치면 최종적으로 세조가 보고 난 후 조두대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능엄경언해》 권10 어제발문
p39. ‘인수대비와 조두대의 인연’ 중에서
성종 4년(1473), 대비의 주도로 간택 후궁 네 명이 뽑혔다. 왕비 공혜왕후는 줄곧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을 두기 어려웠기에 서둘러 간택 후궁을 입궁시켰다. 이듬해 공혜왕후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장례가 끝난 후 인수대비는 성종의 후궁을 다스리기 위해 옛 고서를 참고·인용하여 《내훈(內訓)》을 직접 썼다. 인수대비는 한문과 한글에 모두 능했는데 대궐에 그만큼 한문과 한글을 잘 아는 사람은 조두대 밖에 없었다. 《내훈》을 완성한 인수대비는 조두대에게 발문을 부탁했다. 대비가 일개 궁녀에게 직접 저술한 책의 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다니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공경스럽게도 제가 인수대비(昭惠王后) 전하를 뫼시고, 세조대왕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의 잠저에서부터 양쪽 궁궐 일을 받들어 왔다. (중략) 대비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엄정하시어 왕손들 양육에도 엄격하시었다. 조그마한 허물도 덮어두시려 하시지 않으셨고 늘 정색으로 신칙하셨기에 세조 내외분은 그에게 폭빈(暴嬪)이라는 애정 어린 별명까지 지으셨다.
대비께서는 부녀자들의 무지함을 염려하시어 열녀전(烈女傳), 여교(女敎), 명감(明鑑), 소학(小學) 등의 책에 여자들이 꼭 알아야 할 것들이 흩어져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슬기롭게 이것을 한 책으로 묶어 펴내셨으니 이것이 바로 내훈(內訓)이라는 책이다. 비록 어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우리말로 옮겨 놓으시기도 하셨다.
《성화 을미 맹동 십유오일 상의 조씨 경발》
p.66. ‘생전의 무한한 영광, 무덤에서 받은 형벌’ 중에서
세조를 따라 부처님께 지극한 불공을 올리고 불사를 하며 부귀영화와 출세를 바랐던 조두대.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생전의 영광만을 기도했기 때문일까. 시신이 관에서 꺼내져 목이 잘리고 뼈가 가루가 되도록 부서져 바람에 날렸으니 극락왕생은 이루지 못했다. 성종이 성종 13년(1482)에 조두대에게 양인 신분을 허락했을 때 사신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중략) “두대는 성이 조가이고 광평대군의 가비(家婢)인데,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문자를 해득(뜻을 깨우쳐 앎)하였고, 누조에 내정에서 시중하여, 궁중의 고사를 많이 알고 있었으며,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할 때에는 기무를 출납하여 기세가 대단하였으므로, 그 아우가 대관과 더불어 길을 다투는 데까지 이르러서 큰 옥사를 이루었으니, 그가 조정을 유린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문을 열어 놓고 뇌물을 받아들이니, 부끄러움이 없는 무리들이 뒤질세라 분주하게 다녔다. (하략)”
《성종실록》 145권 | 성종 13년 윤8월 11일
사관은 조두대가 권력을 누리자 그의 일가친척이 교만해 조정 신하와 길을 다투고 조정 신하의 하인을 폭행하기에 이르렀던 문제를 빠짐없이 《조선왕조실록》에 남겼다. 조두대는 부처님의 인과응보와 함께 역사의 심판은 시차가 있을지언정 한 치의 오차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