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오자마자 파우치를 열어젖히고는 번들거리는 땀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도 내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 나는 생명 없는 존재 같았다. 그녀뿐 아니라 모두가 날 그렇게 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치파오는 파우치에 부착된 거울을 통해 번들거리는 땀을 화장 솜으로 찍어낸 후, 검고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돌돌 말아 핀으로 고정했다. 치파오는 그렇게 내 집에 오자마자 자신부터 돌봤다. (「치파오」, 14~15쪽)
나는 도심의 소음과 붐비는 인파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갈로 덮인 비포장길에 서 있다. 건널목만 건너면 집이다. 나는 평화로운 눈으로 한가하고 조용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노후화된 모습 그대로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초록불로 바뀌었다. 신호가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 걸음을 떼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공처럼 튕겨 올랐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고, 순간의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기대에 부풀어 집 앞 신호등 앞에 서 있던 나를 불행이 또 덮쳤다. 예견된 불행일까. 또 누군가 계획한 불행은 아닐까. 차가 내 몸을 던지듯 때리며 멀어졌다. 나는 내동댕이쳐졌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나를 바람이 다가와 흔든다.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전하다」, 146쪽)
어둠이 서서히 종수를 덮기 시작했을 때, 종수는 그 어둠에 의지해 구두코로 풀숲을 후볐다. 풀뿌리가 드러나며 수분 없는 흙이 먼지를 만들었다. 종수는 깊은 한숨을 내어 쉬며 움푹 파인 구덩이 속에 연분홍색 립스틱과 원목 인형을 묻었다. 자신을 괴롭혀온 상한 마음을 흙으로 덮어버렸다. 그것은 양심이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불안을 다스리며, 죄의식마저 묻어버렸다. 그런 뒤 그것이 영원히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꾹꾹 밟았다. 마치 꽃을 밟듯이 지르밟았다.
(「즈려밟은 꽃」, 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