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시간들이 기억으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현재의 시간에 자유의 공간이 줄어든다. 미래의 시간이 기대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그 또한 자유의 공간을 줄인다. 과거 때문에도 미래 때문에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 존재가 여기에 있다. 나의 내적 자유여-자판 위를 열에 들떠 떠도는 열 손가락들은 한 조각 자유를 토로해낼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이름 석 자의 피복 속에서 자유를 꾸며대고 있을까? (「내적 자유」, 54~55쪽)
복숭아 껍질을 벗긴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따 들인 것들이라 당도도 높고, 무엇보다 벗겨 드러난 속살에서 물기가 두둑두둑 듣는다. 두 개를 벗길 양이면 늘 어느 하나가 더 먹음직스럽다. 너무도 당연히 더 맛있어 보이는 쪽을 당신의 접시에 올려놓으면서 느낀다. 누군가에게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내밀면 그것이 사랑일 것. 나란한 두 베갯잇을 새로 갈아 끼우면서 풀기 더 고슬고슬한 쪽을 그리로 밀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 이 시시한 진부한 존중이 어우러져 나란히 서 있는 평행선. (「평행선」, 85~86쪽)
갑자기, 너무나 늦게 깨닫는다, 얼마나 서운하셨을꼬. 인생이 뭘까. 인생관이 다른 딸을 두고 평생 얼마나 참담했을꼬. 단 한 톨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나는 또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까. 아름다운 관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참아야 할까. 내 멋대로,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엄마’가 이제는 없다. 49재를 지났으니 어딘가로 정말 떠나시고 없다. 머리에 꽂았던 하얀 리본이 타들어 가는 초라한 불꽃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101~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