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0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느끼는 모든 것, 나를 매혹하고, 상처 주고, 놀라게 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 낭랑한 밤이 지나 새벽으로 접어들 때면 언제나 사려 깊고 서늘한 새벽의 손이 내 입술 위에 놓이고, 격렬했던 내 외침은 소심한 혼잣말이 되거나, 자신을 안심시키고 두려움을 떨치려 큰 소리로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는 아이의 수다로 변한다.
p23
이제 한 해는, 계절에서 계절로 물결치며 리본처럼 풀어지는 길이 아니다. 1월부터 풀어져 봄으로 오르고 올라 고요한 들판 곳곳마다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타는 듯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초원 위로 눈부신 제라늄으로 물든 여름을 향하던 그 길도, 그리고 안개와 향기, 습지와 익은 과일, 사냥감을 만끽하는 가을로 내려갔다가 햇살 아래 흩날리는 장밋빛 눈과 꽁꽁 언 연못이 반짝이며 소리 내는 건조한 겨울로 깊어 가는 길도 아니다. 그 물결 같은 리본은 서리꽃처럼 두 해 사이에 홀로 매달린 마법의 날 앞에서 불현듯 꺾일 때까지 현기증 나게 내달린다. 새해 첫날….
p27
“늙어갈 수밖에, 울지 마. 손을 맞잡고 애원하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마. 늙어가는 거야,
“천천히, 눈물 없이, 천천히 멀어져. 아무것도 잊어선 안 돼! 너의 건강을, 너의 명랑함을, 너의 우아함을, 네 삶을 덜 씁쓸하게 해주었던 약간의 선의와 정의감을 잊지 마! 단단히 준비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길가에서 헛되이 발을 멈추려 하지 마. 늙어가는 건 피할 수 없으니 다 부질없지. 길을 따라 걸어, 그리고 오직 죽기 위해서만 거기에 누워. 어지러이 굽이쳤던 세월의 띠를 가로질러 그 끝에 이를 때, 너의 곱슬곱슬한 머리칼 한 가닥도, 이빨 하나도, 성한 팔다리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다면, 네 마지막 시간이 오기 전 영원의 먼지가 네 눈에서 찬란한 빛을 가리지 않았다면—마지막 순간까지 너를 이끄는 다정한 손을 네 손에 계속 쥐고 있었다면, 미소 지으며 누워, 행복한 잠을 자고, 너만의 특별한 휴식을 취해….”
p35
드레스 자락을 물들인 물오른 풀잎을 밟으며 마냥 웃고 떠들었어. 너의 고요한 쾌락은 내 광기를 바라보는 것이었지. 내가 찔레꽃으로 손을 뻗을 때, 너도 알지, 그 탐스러운 들장미 말이야, 내 눈앞에서 너의 손이 가지를 꺾어 발톱 같은 짧고 붉은 가시들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 넌 내게 발톱 없는 꽃들을 주었지…. 넌 내게 발톱 없는 꽃들을 주었어…, 내가 가쁜 숨을 돌리고 쉴 수 있게 페르시안 라일락의 영근 수수 그늘로 나를 이끌었지…. 넌 내게 화단의 수레국화를 한 아름 따 주었어, 솜털 같은 꽃술에서 살구 향이 나는 매혹적인 꽃…. 넌 작은 병에 든 커스터드 크림을 주었고 허기진 내 손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지…. 넌 내게 아주 잘 구워진 황금빛 빵을 주었어, 그리고 내 머리 위에 윙윙거리는 벌을 쫓으려 햇살 아래 너의 창백한 손이 또다시 들려지는 것이 보여…. 구름이 길고 느리게 흘러가는 한낮의 끝에서 내 어깨를 외투로 감쌀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취해 소름이 돋았어, 봄날 행복한 짐승들의 천진한 기쁨에 젖어…. 넌 말했지…. “이리 와, 그만 돌아가자”
p98
지금의 우리는 화가들도 열광할 만큼 다양한 색조를 보유하고 있다. 미용술, 화장품 산업은 거의 영화 제작에 버금가는 자본을 움직인다. 여성에게 어려운 시대일수록 여성은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려고 노력한다. 고단한 노동은 해가 뜨기도 전에 우리가 “연약한 생물”이라고 부르는 여성들에게서 짧은 휴식마저 빼앗아 간다. 오렌지 색조 화장과 커진 눈, 창백한 입술 위로 채색된 붉고 조그마한 입술로 대담하게 자신을 감춘 여자는 일상의 눈속임과 하루 분량의 인내, 그리고 절대 고백하지 않는 자존심 덕분에 자신을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