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조금쯤 미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정산은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비웃음을 정색시키려 애를 썼다. 소설이 무슨 생명체도 아니겠고, 소설이 죽었다느니 또 죽은 소설을 염습해야 한다느니, 이게 지금 어느 세상 이야기인가? 게다가 디지털 장례라는 건 고인이 디지털 세상에다 끼쳐놓은 자취를 찾아 영원의 침묵 속에다 묻어주는 일이지, 유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손에 잡히는 물질로 전화되지 않았다 해도 이미 구조화된 소설이라면 유물이 아닐 것인가? (「소설의 유령을 위한 습작」, 70쪽)
그런데 참 묘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여자에겐 거절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임신일지 모른다는 미묘한 우울감이, 제왕절개 수술을 또 한 번 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 그보다는 내 자궁이 진짜 내 아기는 한 번도 키워보지 못한 채로 성능 저하의 늪에 빠져버릴지 모른다는 냉철한 직시가 날 체념 상태로 몰아갔을지도 모른다. 여자와 내가 마흔셋이라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까지 같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감정선을 절대로 넘지 않는다는 내 철칙이 이미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초록 알람」, 121쪽)
“마마께선 저를 온달에게 시집보내리라, 어렸을 적부터 늘 말씀하셨지요. 고구려 온 백성의 아버지인 마마께서 그동안 거짓 약속을 해왔다는 말씀이십니까?”
평강은 아버지 평원왕에게 따지고 들었다. 온달이라는 사내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 자인지 알 순 없으나 어려서부터 그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 마치 친동기간이라도 되는 듯한 정감이 있어왔던 터다. 다만 그 이름자 앞에 붙은 ‘바보’라는 수식어가 조금 맘에 걸리긴 했다. 그렇더라도 꼴 보기 싫은 고 도령과의 혼사를 물릴 수만 있다면 바보든 멍청이든 별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한번 울음보가 터지면 도무지 그칠 줄 모르는 널 어르느라 농담 삼아 했던 말을 금과옥조로 새겼더란 말이냐?”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이도록 새겨주셨지요. 한 나라의 지존께서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내리신 말씀을 손바닥 뒤집듯 그리 쉽게 뒤집을 순 없는 일입니다.”
(「평강의 숲」, 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