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시티는 도시 전체에 햅틱 기술과 홀로그램을 결합한 비주얼 시스템을 적용한 공간이다. 비주얼 시티 곳곳에 자리 잡은 비주얼 시스템 타워를 통해 대기 중에 홀로그램 구현을 위한 레이저 광선이 뿌려진다. 도시에 촘촘히 깔린 광선과 내가 가진 비주얼템이 만나면 다양한 홀로그램이 만들어져 인체의 겉모습에 덧씌워진다. 보이는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손대는 순간 진동을 일으켜 보이는 것 그대로 촉감을 느끼게 하는 정교한 햅틱 기술까지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는 외모에 맞는 목소리까지 구현해 감쪽같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머리칼의 길이며 색깔, 얼굴형, 눈동자의 색이나 눈썹 모양은 물론이고, 몸의 굴곡이나 가슴의 모양, 발의 크기와 손가락의 길이까지 고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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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캡슐은 기껏해야 5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길쭉한 캡슐 모양의 상품이다. 캡슐의 위아래를 잡고 돌려 열면 그 안에 있던 광선 방해 물질이 순식간에 안개처럼 뿜어져 나온다. 안개 속엔 비주얼 시스템 체계를 방해하는 미세한 분말이 촘촘하게 들어 있다. 브이 캡슐에서 나온 안개의 사정거리는 딱 사람 한 명이 뒤집어쓸 정도다. 그래서 브이 캡슐을 적용할 사람이 있다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되도록 대상자의 머리 위에서 뚜껑을 여는 것이 좋다.
일단 브이 캡슐 안의 물질을 뒤집어쓴다면, 그 사람이 입고 있던 비주얼템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진짜 모습이 무방비로 드러난다. 이런 정보는 나도 뉴스를 통해서만 접했을 뿐이다. 최근 들어 번화가에서 브이 캡슐을 든 무리들이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코앞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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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 혼자만의 시간에 어울리는 화장기 없는 피부와 귀여운 파자마를 골랐다. 어쩐지 심심해 보여 동그란 눈도 추가했다. 파리한 입술에 생기를 주고 나니 그제야 만족감이 들었다.
학교 과제도 있고, 소셜 미디어에 새로운 사진도 올려야 하는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온몸의 기운이 다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거울 속의 내 모습만큼은 쌩쌩했다.
내 진짜 기분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다. 내 안에 감추어 둔 본 모습은 나에게조차 숨기고 싶었다. 아니, 이제 무엇이 진짜인지도 헷갈린다. 나에겐 비주얼템은 꾸밈 아이템이 아니라, 자아 그 자체니까……. 비주얼템이 허용되는 나이인 여덟 살엔 엄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고, 이제는 내가 스스로 그렇게 선택한 채 10년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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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말없이 걷던 송모현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애인이라면 브이 캡슐로부터 지켜 줘야 하는 거 아냐?”
나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송모현은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만큼은 그냥 꾸미지 않은 진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거 아닐까?”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진짜 모습을 보여 줘야 할까? 그래서 아빠가 내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는 걸까? 진짜 모습을 보여 준다고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애인에게는 예쁜 모습을 보여 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외모가 어떻게 달라지든 진짜 마음만 있다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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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송모현은 뛰어난 미남은 아니다. 비주얼 시티 애들은 다들 제 개성대로 얼굴을 조합해 만들기 때문에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다들 잘생겼고 예뻤다. 그러니까 비주얼 시티에선 평범한 얼굴이 잘생긴 얼굴인 셈이다. 그에 반해 송모현은 뭐랄까 다른 의미로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다. 어쩌다 내추럴 시티에 갔을 때 보았던 얼굴이나, 어제 그 공원에서 간간이 보이던 비주얼템을 벗은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아직 비주얼템을 착용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끌리는 이유는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송모현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길을 의식한 건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땐 어떤 순간에도 변함없는 피부 비주얼템을 착용한 게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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