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4
규모가 크건 작건, 적어도 단체(복수)여행은 외톨이 여행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데가 있다. 육체노동이라면 수가 많을수록 능률적일지 모르나, 적어도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나 휴식은, 일응 사람 수에 반비례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만리행’을 자기 인생의 길로 삼는 사람은, 끝내 ‘여수(旅愁)에 찌들린 외톨이(étranger)’가 될 수밖에 없고, 그 여행은 ‘외톨이의 방랑(wanderings)’이 될 수밖에 없다.
p90
아무튼 생업(돈벌이)은 끝났다. 퇴근시간이 되어 옷을 갈아입고 승용차를 타는데, 만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정확히 60년 전, 고2를 수료하자마자 1년 휴학계를 내고 교문을 나설 때의, 바로 그 기분이다.
당장, 유효기간이 지난 여권부터 갱신해야겠다.
이제 내게 ‘휴가철’은 없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가을이 있을 뿐.
p132
어젯밤 비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날씨를 걱정했더니 완전히 개었다. 간발의 시차로 태평양의 일출을 놓친 것이 섭섭하다. 밤에 모기가 들어와 잠을 설친 바람에 늦잠이 들었던 모양이 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숙소로 돌아오는데, 등교하는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열을 지어 가면서 모조리 “안녕하세요(おはようございます).” 하고 인사를 한다. 일본 시골길을 걷다 보면 가끔 겪는 일인데도, 그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잠시나마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사라진다.
p212
역사는 과거에 있던 인류사회 생성·변천의 과정이요, 그 기록일 뿐, 서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당대의 인류가 역사를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 기록이나 유적, 이른바 역사가 산일·훼손되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고 정리해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이 있을 뿐이다. 유적을 없애는 것은 귀중한 사료(史料)를 훼손시켜 그 자체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고, 후손들을 위한 아까운 관광자원만 하나 멸실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p206
은사 할머니가 떠오르면서 마음이 개운치 않다. 생각 난 김에 셀폰을 꺼내 작별 인사를 하자, “꼭 다시 와야 해요. 우리 죽기 전에….” 하고 또 흐느낀다. 내가 “그래야지요.” 했어도, 내 목소리에 자신이 없는지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
생각하니 그때 선생님의 언행으로 미루어, 선생님의 처지가 외롭다는 것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모르는 체하고 돌아설 바에야, 무엇 때문에 그 멀고 외진 곳을 찾아 갔단 말인가. 특별히 바쁠 일도 없었는데, 더도 말고 이틀만 더 묵고 나올 수는 없었던가. 전에 없었던 “죽기 전에….”라는 한마디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