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활활 타오르는 햇살 아래에서 지나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하여 석준은 눈시울을 한껏 좁힌다. 지나가 라라처럼 슬픔에 가득 찬 깊숙한 눈빛으로 그를 끌어당기며 손짓하는 것만 같다. 이제야말로 그는 지나를 꽉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이프성의 붉고 육중한 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이프 성에 갇히다」, 40~41쪽)
순간, 남편의 눈동자가 노을빛으로 물든다. 아득한 우주에 붉은 달이 둥실 떠오른다. 범접할 수 없는 외로움과 슬픔이 가득하다. 부조리로 가득 찬 지엄한 실존의 벽에 부딪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그 여자는 숨이 턱 막힌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알베르 카뮈의 환영이 어른거리고 있음을 그 여자는 또렷이 감지한다.
‘인간은 자기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천재(天災)나 전쟁이 있는 한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반항하면서 죽어야 한다.’
그 여자는 남편의 환청을 들으면서 붉은 달에 휩싸인 핏발 선 눈동자를 언제까지나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마침내 그 여자는 손을 들어서 남편의 부릅뜬 두 눈을 애틋하게 감싸준다. 그 여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비가 되어 하염없이 흐른다.(「붉은 달」, 105~106쪽)
“기수야, 이곳에서 죽으면 우리 영혼은 어디로 갈까? 고향으로 가기는 너무 멀지 않겠니?”
아내는 기수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기수는 그저 아련한 시선으로 지평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글쎄요…….”
“난 내 고향에 묻히고 싶다. 너희들이 제사를 지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내 땅에 묻히고 싶어. 그곳이 영원한 내 집이야. 이곳에서는 모든 게 너무 낯설어. 난 월표고 뭐고 이제는 타기 싫다. 그까짓 거 타서 좁은 아파트에서 새처럼 갇혀서 먹이만 축내고 살면 뭐 하니. 죽으면 박제된 것같이 화사하게 분장을 해서 두껍고 단단한 관에 꼭꼭 갇혀 있으면 뭐 해. 화장해서 낯선 이곳 땅에 뿌리기도 싫구. 난 고향 땅에 묻혀서 곱게 썩어 흙이 되고 싶어.”(「꿈꾸는 노스탤지어」, 246~247쪽)
너는 흐릿한 눈을 들어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한 여인이 너의 가슴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너는 두 팔을 벌려서 그 여인을 가슴에 가만히 껴안는다.
그 여인은 긴 머리를 흩날리면서, 아득한 벽공을 흰 눈동자로 바라본다. 머리 위에는 꽃뱀을 이고, 가슴에는 한 송이 장미꽃을 품어 안고 있다. 여인의 모습에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와 평화가 아련하게 풍기는 듯 고즈넉하기만 하다.
내가 처음 보는 너의 모습이다.
그윽한 향기가 내 콧속으로 스며들자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이 비로소 환히 보인다.
이제 나는 너를 떠나도 될 것 같다. 나는 세차게 발을 굴러서 몸을 날린다.
눈부신 햇살 아래 난만하게 피어 있는 벚꽃 구름을 향해서.(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