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 ‘당신의 킬리만자로는 무엇인가요?’ 중에서
아마 사람들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킬리만자로를 다녀오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서 얻는 것이 정말 있는지?’
‘도대체 산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끌리는 건지?’
‘꼭 등산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다 등산 같다. 더구나 오늘이라는 하루는 항상 처음 오르는 산이다. 가본 길처럼 보여도 어딘가 낯설다. ‘하루’라는 산에도 오르막, 내리막, 평지길이 있고, 흙길과 먼지길, 자갈길과 너덜길, 때로는 절벽길까지 같은 것도 있다.
어떤 날은 아래에서 출발해 쉼터를 지나 정상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정상 없이 평탄한 길만 걷는다. 그리고 가끔은 정상을 빼고 오르내림을 반복하기도 한다. 목표한 지점까지 가지 못한 채 다시 출발지도 돌아오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은 생각보다 잘 걸어지고 어떤날은 시작부터 힘에 부친다. 마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그 하루가 어떤 날이었든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얼마나 험한 길을 걸었는지는 같은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루를 다 걸으면 결국 처음 출발했던 높이까지 다시 내려와 있다.
킬리만자로를 다녀왔다고 해서 산이 갑자기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숨은 찼고, 다리는 무거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힘듦’을 무작정 밀어붙이거나 피하지 않고 알아보게 되었다.
35p. ‘우리의 지도는 산길로 그려진다’ 중에서
평생을 함께할 사람과 나란히 바라보는 풍경은 혼자일 때와 사뭇 달랐다. 같은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남겼다. 서로 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던 순간은 어떤 말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힘겹게 걸을 때 주고받던 눈빛의 위로, 말없이 서서 바라본 산맥의 장엄함. 함께한 그 모든 것이 이전보다 깊게 다가왔다.
고된 여정을 지나오며 우리는 한층 단단해졌고 앞으로 다가올 힘든 날에도 그 온기로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ABC 트레킹을 신혼여행으로 한 것은 참 우리다웠다. 히말라야는 단순한 트레킹지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의 길을 어떤 태도로 걸어가야 할지를 알려준 곳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히말라야의 여운은 오래 남아 있었고 그 기억은 우리를 다시 산으로 이끌었다. 길 위의 시간은 우리를 여행자로 남기지 않고 산을 걷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언제부터인가 쉬는 날이면 배낭을 챙겨 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등산화 너머로 전해지는 땅의 감촉,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젖은 티셔츠를 시원하게 말려주는 바람. 그 안에서 말이 필요 없는 에너지를 얻었다. 산을 걷는 동안만큼은 유난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산길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산을 향한 마음이 점점 커질수록 우리는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64p. ‘낯선 땅에 들어서던 날’ 중에서
뜻밖의 문제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공항 직원들은 정후의 배낭과 엑스레이 화면을 번갈아 보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배낭 안의 짐을 모두 꺼내보라고 했다. 직원은 배낭 안에 들어 있던 촬영 장비의 용도를 물었다. 우리는 취미로 촬영한다고 설명했다. 배낭에는 미러리스 카메라 바디 세 개, 렌즈 세 개, 액션캠과 마이크, 삼각대, 여러 개의 배터리가 들어 있었다.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우리 일행은 인당 허용된 배터리 용량을 최대치로 채워 가져왔던 터라, 마음이 불편했다. 혹시 괜한 트집을 잡으려는 건가?
공항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얼굴의 긴장이 풀렸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조금 전까지 입국장의 소란이 단번에 씻겨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는 듯했다. ‘신고식 제대로 치렀네.’ 굳어있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미리 준비해 둔 밴에 올라 모시를 향해 달려갔다.
이것도 통과의례일까? 인생의 순간순간 찾아오는, 꼭 해야 하지만, 귀찮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는 순간들. 입국장의 소란함이 지나가자 왠지 모를 기대감이 솟았다.
93p. ‘낯선 걸음 속에 찾게 된 나만의 속도’ 중에서
오후 4시. 시라 캠프의 넓은 고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미 여러 그룹이 도착해 텐트를 세우고 있었는데도 공간이 넉넉해 붐비는 느낌은 없었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캠핑장 정면에서 바로 보이는 킬리만자로 정상이었다.
여기서부터 정상의 웅장함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정상에는 구름이 간간이 걸려 있었고 그 사이로 회색 바위와 붉은 흙빛 줄기가 훤히 보였다. 텐트 밖으로 고개만 내밀면 곧장 킬리만자로가 눈앞에 있었다. 어디에 텐트를 쳐도 명당이었다.
노을빛이 하늘을 물들일 즈음 텐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구름은 자취를 감추었고 하늘은 불타는 주황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위로 하얀 보름달이 떠올랐다. ‘어쩜 저렇게 밝을 수 있지?’ 문득 동생이 군대 시절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달빛만으로도 길을 찾고 동료의 얼굴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과장이라 여겼는데, 눈앞의 달을 보니 그 말이 이해됐다. 일부러 누군가가 걸어 둔 듯, 산 오른쪽에 둥근 달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179p. ‘정상에서의 뜻밖의 고민’ 중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먼 능선 뒤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던 구름이 어느새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푸덕이와 꽁치에게는 정상에 가려면 지금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는 좀 더 고민해 본다고 덧붙였다. 사실 그 말은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살짝 당황한 듯해 보였지만 이내 알았다고 했다. 나는 조심히 다녀오라며 손을 들어 배웅했다. 우리는 스텔라포인트를 천천히 함께 걸었다.
카메라에 풍경을 담고, 사진을 남기고, 눈앞의 빙하와 분화구를 다시 한번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구름은 순식간에 밀려들었고 어느새 우후르피크로 향하는 길도 흐려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보이던 능선이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시간도 어느새 1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손끝이 서늘해지고 으슬으슬 한기가 올라왔다. 이제 정말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마음을 다해 인사를 건넸다.
‘잘 있어. 또 올게.’
‘그때까지 이대로 있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