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그들에게 집을 주긴 했지만, 명의까지 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직 준호에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죽기 전엔 자식들에게 신발 한 짝도 물려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차가운 커피를 다시 한번 쪽 빨자 준호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내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그래, 나는 지금 연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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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 물살처럼 허망한 것들, 노을로 기다릴 강 끝 역에 닿으면 절망조차 저버릴 것들이 그래도 강변 따라 봄을 산다 물가에서 죽겠다는 봄빛 유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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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면 뭐? 이게 이제 말대꾸까지 하네. 모두 오냐오냐 하니까 네가 귀한 집 도련님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첩년 새끼 주제에.”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어버린 후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순철의 흔들리는 눈동자 아래에 금세 물이 고여 속눈썹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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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뜬 밤의 거친 숨소리가 먼 하늘의 별들을 깨우고/달빛은 바람을 가르며 일렁이는 강물과 몸을 섞으며/대지의 심장 깊은 곳까지 장밋빛으로 물들어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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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막힌 콘크리트 방이었다. 소리가 통과하지 않는 방이었다. 그 방에서 스물셋의 나는 무엇도 말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아무것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닫았다. 그러는 사이 두개골이 부서졌고 안면 근육이 매몰되었다. 갈비뼈 여섯 개가 금이 갔다. 버티지 말아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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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채로,/젖어도 되는 사람인 양//제 발을 물속에 말리는 사람을 보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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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1년이 넘도록 이별의 과정은 계속 진행되었었다. 어쩌다 들이닥치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연락을 취할 때가 있었고, 그런 소모의 감정들이 쌓여가면 K의 답이 드문드문 오는 식이었다. 그마저 남아있던 관계도 파괴되어 그녀의 전화번호가 바뀌기도 했고, 신기하게도 그 전화번호마저 내가 알아낼 때도 있었다. K에게서 혐오와 분노의 표현이 날아오는가 하면, 슬픔과 우울의 토로가 이어지기도 했다. 둘이 잠시 만난 적도 있었고, 관계 회복이 될 듯하다. 청춘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몸과 마음을 망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우리의 이별은 차츰차츰 완성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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