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중에서
최정희의 장편소설 『끝없는 낭만』은 한국전쟁기 서울에 주둔한 미군과 사랑에 빠진 여성의 이야기다. 일면 전쟁을 초월한 낭만적인 로맨스 서사처럼 들리지만, 소설에서 초점이 맞추어지는 풍경은 탈식민과 냉전이 교차하는 한반도에 새로운 점령군으로 도착한 미군,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에서 낙인과 혐오의 대상이 된 여성들, 그로 인해 여성 주체가 겪는 히스테리, 광기 그리고 죽음이다.
(중략) 최정희는 식민지 시기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여성의 이야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해온 작가다. 이 소설은 그 계보를 이으면서도, 이전까지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지 않았던, 나아가 기존의 한국문학에서도 거의 탐구된 적이 없었던 아시아인과 미국인 간의 인종과 국경을 넘는 로맨스를 냉전 시기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낸다. 특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결말에서 나타나는 판본들 간 개작 양상은 이 소설에서 작가가 인종, 민족, 젠더, 계급 등 여러 차원에서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의 발화 문제에 특히 신경 썼음을 시사해 주목된다.
―나보령(국립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조교수)
(전략) 등장인물들은 집, 직장, 다방, 친구 집 등을 전전하며 술을 마시거나 타인을 의심하고 질투하며 무의미한 일상을 영위한다. “현대 청년들은 갈 데가 없다고, 불안과 공포 속에 떨고 있다”고 스스로를 진단하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면서 “줄곧 집 안에 들앉아 침울하게”(70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미래는 없으며 현재 또한 소진해버리면 그만일 뿐이다.
따라서 형재는 자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을 '떼스마스크'에 비유한다. 이들의 삶은 계획과 반성으로 이어나가는 '살아 있는' 일상이 아니라, 불안과 의심과 질투, 오열 속에 간신히 버텨나가는 이미 '죽은' 삶이기 때문이다. 이는 1950년대를 바라보는 당대 지식인의 허무주의적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전후 혼란한 정치 현실과 무질서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래를 전망할 수 없는 무기력함과 답답함이 자신과 타인들의 얼굴에서 '생기'를 걷어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 직후 사회 전반을 드리운 불안과 니힐의 정서가 29세의 젊은 지식인의 미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음을 소설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병순(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