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중에서
(전략) 『녹색의 문』은 일간지 및 월간지에 연재된 소설이니만큼 처음부터 대중 독자를 강하게 의식하고 쓰였으며, 특히 여성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 위해 연애와 결혼을 주제로 삼는다. 그런데 최정희는 이 주제를 쉽고 유쾌하고 편안하게만 다룰 수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에서 「녹색의 문」 연재를 시작할 당시 최정희는 두 번의 굴곡 있는 결혼 생활을 거치고 난 후 홀로 두 딸을 키우고 있었다. 최정희는 가정을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깊은 분노와 억울함을 느껴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험으로 인해 여성에게 있어 남성과의 관계란 결코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불행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략)
이로써 『녹색의 문』은 신생 반공국가 대한민국에 반(反)하는 불온한 활동 예컨대 친일 활동이라든지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과거의 책임을 여성에게 물을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유보화와 도영혜가 친일 행위를 하거나 좌익 운동을 했던 것은 각각 친일파 남성 이성배와 공산주의자 남성 성완수와 어쩔 수 없이 성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며, 이 관계들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서가 유보화와 도영혜에 대한 책임을 비겁한 방식으로 회피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유보화와 도영혜는 처음부터 김영서가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아보았으며 그에게 기꺼이 종속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살 길을 이기적으로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 여성들을 버렸으며 이로 인해 이들은 그때그때 자기 살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여성들이 범한 죄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이 여성들에 대한 책임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대한민국에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살든 죽든 버려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대한민국'을 배신했던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한경희(한국학중앙연구원 신집현전 태학사 과정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