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어른의 상이 뚜렷한 편인데 당신은 단언컨대 해당되는 면이 전부였다.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적부터 느꼈다. 어딘가 통달한 듯한 분위기, 감히 지나온 삶을 알고파졌다. 차곡히 내공이 쌓인 느낌이랄까. 당신 앞에선 구태여 눈치 볼 일이 없어 좋다. “제 앞에선 나긋해지는 것 같아요.” 정확히 나를 콕 집은 말이었다. 평소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경우 겉보기와는 달리 속 안이 잔뜩 경직되어, 일부러 더 활발하게 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이토록 좋고 편안한 사람을 만날 시엔 한껏 풀어져 부드러워지고 나른해지며 템포가 확연히 느려진다. 이게 가장 나답다고 여겨진다.
어느 날은 당신을 무척이나 닮고 싶어서, 당신이 하는 말마디들을 따라 하고 당신이 듣는 음악을 따라서 들었다. 그러하면 당신과 얼추 비슷한 내가 된 것 같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잇따라 고백하자니, 난 당신이 날 흠씬 귀여워하는 눈 맺음이 좋다. 정말이지 그 찰나마다 내 이야기를 하고픈 충동이 일어난다. 그간 겪어온 무수한 사연들을 남김없이 떠들어도 당신은 그저 날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결코 떠나지 않을 듯하단 착각에 해롱이게 된다. 그리고 착각이 부디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게 된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오래된 노래처럼.
- 오래된 노래처럼 당신을 좋아하고 -
[아무도 해하지 않을 것 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다.] 첫 문장을 적어둔 채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을 쳐다본다. 제로 코카콜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러며, 누군가와의 대화 중 “콜라는 코카콜라죠” 했던 멘트가 떠오른다. 만약 출간할 시 코카콜라가 진리라고 한편에 적어달라 했던 것 같은데. 책상 위엔 이틀 전 구매한 책 두 권이 펼쳐져 있다. 좀처럼 집중이 되지를 않는다. 펜을 굴린다. 아무도 해하지 않을 듯한, 무해한 사람.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가?
무해한 것들을 주고 싶었다. 잔뜩 때 묻은 이 세상 속에서,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깨끗이 맑고 순수한 것들을 전하고자 했다. 그게 잘 되지는 않았다만, 예컨대 떳떳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사랑. 발음하자니 첫 음은 뾰족한데 뒤에 붙은 랑으로 인해 한껏 둥글어지는 느낌이다. 나만 그러한가. 선한 눈매를 생각한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타인을 대하는 인물을 그려본다. 남들이 부르면 어디든 군말 없이 달려가는 사람이라고 설명할까. 덧붙여 무언가 불편해하거나 필요로 하는 사람이 생길 경우 잰걸음으로 다가가 상냥하게 알려주거나 친절히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면 충분하려나. 게다가 항상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자세와 모양새로.
물론 누군가의 이미지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사람은 이렇지 않은데, 내가 이쪽 면만 보고서 집요하게 상상력을 부풀리다 보니 그것이 곧 그 사람이 된 것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의 나도 피차일반일 테고 말이다. 최근 Y가 했던 말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Y는 ‘그 사람 원래 그래’라고 단정 짓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고 했다. 누구든 한 사람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하기야 어디서 보기론 사람은 평생 자신을 알기 위해 살아간다고 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나를 누군가가 이러쿵저러쿵하며 ‘원래’란 단어로 틀에 가둬버린다는 것이.
[네가 느끼는 기쁨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
이젠 의미 없어진 편지 내용을 본다. 난 우리가 한때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다. 결코 서로를 다치게 할 리 없단 판단이 섣불렀던 건지. 그래도 잠시나마 빌려온 온기로 따뜻했다. 도로 돌려주고 돌아섰다.
“너 웃을 때 되게 무해하단 느낌을 받아, 굉장히 순수한 그 웃음이 있어” 나는 마지막으로 당신 앞에서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과연 난 당신께 무해한 사랑을 보냈을까.
당신은 행복했을까.
남들에게 유하고 다정하단 소리를 곧잘 듣는 내가,
당신께는 절반도 못 그런 것 같아 미안해진다.
- 무해한 사랑을 보내요 -
그만할래요. 이제 모르는 사이가 되어도 돼요. 내가 헷갈릴만한 애매한 말장난으로 온 밤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해요. 더는 당신이 재미 보는 일에 함께하고 싶지 않아요. 나 홀로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수 없이. 지금 이 다짐도 그래요. 좋아하지 말아야지. 진짜 얼굴 보고파 하지 말고 그 쓸데없는 희망 고문에 놀아나지 말아야지. 한 삼만 번쯤은 더했을걸요. 매번 실패하기 일쑤였다만 이번엔 좀 달라요. 정말 안 좋아할 거예요.
당신도 다 눈치채고 있잖아요. 알면서 그리 생글생글 눈꼬리를 접으며 나를 홀리는 거잖아요. 애당초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내일은 정말로 나를 사랑해 주기라도 할 것인 양 굴어보는 거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우스웠겠어요. 당신의 사소한 모든 것들에 일일이 반응하는 내가 얼마나 쉬워 보였겠어요. 작은 기침 소리에도 화들짝 놀래며 달려가고 무언가를 주기 위해 쭈뼛대는 모양새가 미련하기 짝이 없었잖아요.
솔직히 은근히 기대어오는 어깨에 와르르 무너졌어요. 누구에게나 툭 던지는 농담에 ‘혹시 나에게만 이러나’했고요. 오죽하면 의미 부여의 달인이 된 것도 같네요. 몽땅 부질없는 짓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진심으로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이상을 이어가지 않을 작정이에요.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우연히 마주칠 적에는 황급히 등 돌려 피해 보기로 할게요. 연락을 하고픈 마음도 꾹 참고서, 당신을 좋아한 만큼 최선을 다해 당신을 잊어보는 일에 몰두하도록 할게요.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며 참 많이 울고 웃었어요. 이러한 경험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덕분에 무료하지 않은 삶이었다고 고백하며 마무리 짓겠어요.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끝이에요. 혼자 한 사랑이니 인사할 것도 없네요.
- 혼자 한 사랑에도 이별이 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