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들이 남긴 돗자리. 한강과 이태원을 거쳐 재영과 선주 앞에 도착한 물건. 그것의 네 귀퉁이에 신발을 하나씩 올려놓고 선주는 누웠고 재영은 앉았다. 둘은 동생들에게 미안했던 순간들을, 자주 이야기 나누던 몇 개의 장면들을, 또 이야기했다. 매일 밤 방의 불을 꺼달라고 심부름을 시켰던 일, 컵을 깨끗이 안 씻는다고 잔소리했던 일, 엄마에게 혼이 나서 붉어진 얼굴에다 대고 인상 펴라 말했던 일, 월급을 받았으면 가족들한테 선물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제넘은 훈수를 뒀던 일. 그런 것들이었다.(강석희, 「선과 부피의 사랑」, 15쪽)
찹찹이는 그동안 얼마나 매만졌는지 코팅 비닐이 벗겨지고 금박과 은박 무늬들이 흐려져 있었다. 신조는 카드의 겉칠이 벗겨진 만큼 자신이 배송이를 걱정했다는 걸 알았다. 찹찹이는 그 시름의 증거가 아닐까. 그러니까 불안은 애정과 떼어낼 수 없는 짝이자 서로의 뒷면이라고. “야, 기죽지 마. 너처럼 오버해서 상상하는 것도 재능이야. 챗, 지피티 시대잖아.” 신조는 용감무쌍한 주문을 외듯 배송이의 말을 되새겼다.(김멜라, 「아무래짜」, 70~71쪽)
“있잖아, 누나,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히데오는 그렇게 말했는데, 그 말이 내게는 상처받지 않은 자신, 따돌림도 비밀도 없는 성장기를 가지고 싶다는 얘기로 들렸다. 그리고 나는 거의 직관적으로 영도를 떠올리게 됐다.
“그런 사람은 좀…… 끔찍할 수도 있지 않을까?”(서장원, 「히데오」, 97쪽)
“뭔가 바꾼다고 말하는 사람들, 엄마는 꼴 보기 싫더라. 노동자, 인권,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진짜 싫어. 바꿀 수 있었으면, 우리 현식이가 안 죽어도 됐잖아. 그런 생각 하면 엄마는 살 수가 없어.”(서장원, 「대부호」, 131쪽)
문득, 20여 년 전 퇴근을 하고 돌아와서는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식사 준비를 하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총총대는 칼질의 리듬에 맞추어맥없이 뒷덜미를 흐르던 그 땀방울. 우리가 떠났던 여름휴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별장, 식당 구석의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젖어 있던 어머니의 옷과 머리카락도 떠올랐다. 추저분한 체념과 자기기만의 결정체, 방울져 내리던 것. 아버지와 내가 별장을 떠날 때, 어머니가 훔치던 눈물, 그오싹하고 달콤한 야심의 형상. 같은 몸에서 나온 것, 같은 몸을 타고 흘러내린 것.(손보미, 「우리 엄마는 남미새」, 188쪽)
모임이 가장 북적였던 칠십 대 중반 즈음엔 한번에 열 명 넘게 모이기도 했다. 서로 돈 문제로 낯을 붉히기도 하고, 배필을 잃은 후 외로운 사정을 나누다가 뒤늦게 살 닿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그런 폭풍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모임에 반짝 불온한 활기가 돌았다가 몇 년 후 한두 명 인원이 줄어든 채로 좀 더 아늑해졌다. 팔십 대 이후로는 별다른 격동 없이, 지속적으로 인원이 줄었다. 그들은 성실하게 장례식에 참석해 친구를 애도하고, 다시 모였다.(심윤경, 「우리는」, 203쪽)
운주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옛 친구를 찾는지 정확히 알았다. 옛날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겁이 없고 충동적이고 폭력적이고 부모를 울리고 상한 우유를 바로 들이켰는지. ‘맛이 갔나?’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썩은 우유를 삼켰는지. 나쁜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와 추억을 나누며 노스탤지어의 캠프파이어를 활활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왕년에 한가락 했다고 두고두고 떠들며 과거의 꿈속에 사는 사람처럼.(이미상, 「일일야성」, 237~238쪽)
지윤은 오래 연습해서 가장 익숙한 표정 하나를 꺼낸다. 입꼬리를 올리고 치아를 드러내며 엄마에게 미소를 보인다.
"우리 지윤이는 웃는 표정이 참 이쁘다."
엄마는 알 수 없는 표정을 또 짓고 있다. 앞으로도 지윤은 엄마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놓칠 것이다. 지윤은 알고 싶다는 마음이 짙어질수록 모르는 것들로 휩싸인다. (임솔아, 「금빛 베드 러너」, 274쪽)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 부끄러움을 견디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게 아닐까요. 실은 가장 미운 건 자기 자신이면서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으니까…… 희망이 아니라 경멸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견디게 하는 거 아닐까요.(임현,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301~302쪽)
영원은 없다 해도, 끔찍한 추락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하루가 연이어진다면 그 연쇄가 어쩌면 영원일 수 있다고, 어떤 하루는 영원처럼 길었으니까.(조해진, 「영원의 하루」, 329쪽)
연구팀은 때때로 핵심적인 일화들이 말해지는 순간을 만났다. “탄가루보다 더 시커먼 게 내 속”이라고 말을 토해내는 구술자의 이야기 속에서, 이것이 바로 탄광촌 여성들의 리얼리티라고 여겨지는 조각들을 만났다. 하지만 구술자들이 마지막에 말을 번복하거나 삭제를 요청하는 부분은 대개 그 핵심적인 조각들이었다. 면담이 모두 끝나고 구술을 텍스트화하는 작업이 시작될 때, 연구자가 청자에서 화자로 전환될 때, 그때가 구술자도 면담자도 시험에 드는 때였다.(최은미, 「김춘영」, 348~3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