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야, 나 피아노 좀 가르쳐 줘.”
수아는 바로 그러자고 했다. 처음 배운 곡이 솔솔라라 솔솔미로 시작되는 ‘학교 종이 땡땡땡’이었다. ‘젓가락 행진곡’의 일부, ‘엘리제를 위하여’의 한 부분을 배우면서 나도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주변에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는 없었다. 피아노 학원뿐 아니라 다른 학원에 다니는 아이도 없었다. 이 건물엔 어떤 학원도 없었다.
결심했다. 엄마에게 졸라보자. 며칠을 눈치만 보고 있다가 말도 꺼내 보지 못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은 엄마가 나의 겨울 외투를 얻어온 날이었다. 사촌 언니가 입던 걸 가지고 온 것이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두벌의 옷과 외투 하나로 지내던 시절이니 비록 입던 것이지만 새로운 외투가 생긴 것이 좋았다. 그 밤, 퇴근한 아빠는 그 옷을 보고 화를 많이 내었다. 엄마와 다툰 후 얻어온 옷이지만 나에겐 새 옷이었던 그것을 찢어 버렸다. 나는 싸움이 무서워서 울었고, 옷이 아까워서 울었다. 새 옷을 사주지도 않으면서 겨우 하나 생긴 것에 그렇게 화를 내야 했던 아빠의 행동엔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의 서운함을 잊지 못한다. 그즈음 두 분은 자주 다투셨다. 그 원인은 언제나 돈 때문이었다.
끝이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나비야, 나비야’를 끝으로 수아의 가르침도 끝났다.
- 처음 구경한 피아노 - 중에서
한 주에 한 번 가던 상담을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이면서 약의 수도 줄였다. 6개월을 약에 의지해 살다 치료를 그만두기로 했다. 나를 믿지 못해 걱정스러웠으나 의사가 당부한 대로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해 보기로 했다. 집 앞 태권도 학원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태권도, 복싱, 발차기, 줄넘기. 시키는 운동은 모두 했다. 마지못해 시작한 운동은 하루하루 더해질수록 절대 없어선 안 될 일과가 되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맛이 올라올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운동복이 온통 젖을 정도로 땀이 흐르는 날은 만족감이 더 컸다. 몸은 근육통으로 아프고 쑤셨지만, 머리는 맑아졌고, 마음은 편안했다.
엄마를 친정을 남편을 그리고 나를 원망하며 사는 건 그만두어야 했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큰아이를 위해서도, 나를 보며 자랄 작은 아이를 위해서도 조금은 당당해져야 했다. 쌓이는 나뭇잎처럼 지난 일들을 쌓아두고 지금의 하루하루를 그 속에 숨어 살 수는 없었다. 땅만 보던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고, 주눅 들어 굽어진 어깨와 허리는 곧게 펴야 했다. 당당하게 자신 있게 견뎌야 할 날들이 더 많을 테니.
- 허리는 펴고 목은 꼿꼿하게 - 중에서
“젊은 애가 왜 이렇게 살아?”
집에 쌓여 있는 신문을 보면 나를 오래 지켜본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모두 같은 말을 했다. 젊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들에게 다시 물어보고 싶었다. 나의 자린고비 같은 삶이 역시 젊은 그들에게 한심해 보였던 걸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작아졌다. 화가 나기도 했다. 마치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모른다. 내 경험을 모른다. 그렇다면 어쭙잖은 위로나 충고는 조심해야 하는 게 맞다.
“네가 힘든 건 아는데….” 라며 시작하는 말은 언제나 충고로 끝이 났다.
그들의 충고가 끝나면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이에 따라 옳게 살아가는 방법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젊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50대가 된 지금도 어떻게 사는 게 맞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내게 주어진 하루를 한 주를 한 달을 채워 나갈 뿐이다.
- 젊은 사람이 왜 이럴까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