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이름은 ‘은’이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글자의 미로를 애타는 마음으로 걷고 있다.
달빛이 어두워진 계곡 주변을 제법 환하게 비췄지만, 여자의 왼쪽 눈에는 큰 상처가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 이후, 여자가 자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남은 오른쪽 눈으로만 의지한 채, 처음 ‘ㅅ’의 입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천천히 벽을 더듬으며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ㅅ’의 마지막 획을 통과하려 했다.
생각보다 미로의 바닥은 미끄러운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맨발인 그녀에겐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겁게 다가왔다. 몇 번씩 미끄러질 위기를 잘 모면하면서 간신히‘ㅅ’의 마지막 획을 통과했다. 그리고 ‘ㅏ’쪽으로 향하려는 순간, 갑자기 죽은 남편의 환영이 미로 벽 거울 속에 나타났다.
물에 빠져 온몸이 퉁퉁 부풀고, 두꺼운 골판지처럼 생기를 잃은 남편이 공허한 눈빛으로 그녀 앞에 홀연히 서 있었다.
혼이 빠져나간 그의 육신에서 꺼칠꺼칠한 계곡물이 똑똑! 똑똑!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물방울은 바닥의 경사진 방향으로 조금씩 흘러내렸고, 살짝 비린내가 났다.
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멀쩡한 나머지 눈마저 천천히 감았다.
이승에서 여자는 꽤 실력 있는 수영선수였다.
초등학교 시절,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 시작한 학교 수영 클럽 활동에서 그녀는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 은의 미로 - 중에서
영태는 초미가 가리킨 옷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작게 숨을 고르고 기합을 넣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옷장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초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다음 장면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때 손가락 사이로, 분명 거실 구석에 있어야 할 분홍색 아령이 안방에서 보였다. 자신이 거실에서 운동할 때 늘 사용하던, 3kg짜리 그 아령이었다.
당황했던 초미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안 그래도 숨 막히게 더운 한여름 날, 답답한 옷장 안에서 식은땀을 흠뻑 흘리던 나는,
현기증이 점점 심해져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결국, 나는 옷장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왔다.
눈앞에는 내 얼굴을 보고 입을 벌린 채 경악하는 동생과, 침대 옆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파트너 초미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동생 영태가, 한껏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어! 어... 형? 여, 영철이 형이 왜 초미의 옷장 안에 있는 거야? 그, 그 노란 티는...”
잠시 말을 잃은 초미가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분홍색 아령을, 영태의 뒤통수에 힘껏 휘둘렀다.
- 초미의 관심사 - 중에서
(20XX년 X월 X일 오후 두 시 삼십 분, 00번째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나도 앞에 놓인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궁금한 것이 많아 보이는 형사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석호 형사님,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여기 정신의학연구소 소장입니다. 예? 아... 그렇군요. 안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게 궁금하셨군요.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제게 궁금한 질문을 먼저 주시면, 얼마 전 이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조금 전 질문을 한 번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질문 중간에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요. 예? 아, 물론이죠. 천천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여기서는 남아도는 게 시간뿐이더라고요, 허허허.”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형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잠시 뒤, 아귀 같은 큰 입이 천천히 열리며 그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사의 질문)
[이 동네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김 씨가 얼마 전, 본인 이발소 안에서 누군가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고, 결국 살해당했습니다.]
- 야수의 기억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