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삶을 책으로 읽는다면 너무나 유족한 그의 가문과 뛰어난 천재적 면모에 주눅 들기 십상이고,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삶을 읽어도 매우 괴팍하거나 굉장히 비극적인 특이한 인간상을 만나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그림 형제는 다르다. ‘보통 사람’임에도 고통과 영광으로 점철된 그들의 꾸준한 삶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p. 7)
‘그림 형제’라고 하면 대부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 그러니까 이른바 ‘그림 동화’만 떠올리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형제가 남긴 다른 업적은 상대적으로 잊혀 형제의 방대한 연구 성과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그림 형제는 결코 ‘동화 작가’가 아니다. 형제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즉 민담을 수집해 책으로 펴냈고, 그 과정에서 정리한 편집 지침은 훗날 민속학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 형제가 왜 민담을 수집했는지, 왜 민담에서 그치지 않고 민요나 전설, 신화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는지, 이런 점을 명확히 알아야 형제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p 13).
이렇게 다른 점이 많았지만 야코프와 빌헬름은 평생 삶을 함께하며 부족한 곳을 채워 주고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동반자였다. (p. 21)
야코프는 마치 탐험가처럼 오랫동안 묻혀 있던 과거의 유산들을 발굴해 갔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지친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p. 64)
전 세계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지만, 우리는 평화롭게 학문에만 매진하고 싶다는 소망을 원동력 삼아 오랫동안 잊힌 문학을 발굴했다. 단순히 과거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 게 아니라 연구를 통해 예전과는 다른 시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p.96)
그림 형제 또한 셸링을 필두로 하는 낭만파와 자연주의 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민중 속에서 저절로 태어나 자라나는 전승문학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 형제가 책의 제목을 ‘독일’ 메르헨이나 ‘그림’ 메르헨이 아니라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이라고 지은 점에도 주목할 만하다. 진짜 전승문학이란 무엇인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고민한 흔적이 드러난다. (p.121)
민담을 읽다 보면 그 속에 실타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실 한 가닥을 잡고 이야기를 따라 더듬더듬 나아가다 보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메르헨, 곧 민담의 진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p.106)
빗방울과 이슬은 이 땅 위의 모든 것에 축복처럼 내려오지만, 자기가 키우는 식물은 너무 민감해 다칠 것 같다며 밖에 내놓지 않고 방 안에서만 물을 주려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비와 이슬을 전부 없애 버려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연에 있는 것이라면 모두 나름의 결실을 맺기 마련이며, 우리도 그런 점을 목표로 나아가야 한다. (p.159)
그림 형제는 이야기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 원형을 당대 사람들의 시각에 맞게 다듬었다. 한순간의 인기를 위해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교훈적인 방향으로 내용을 수정하는 일도 없었다. 만약 이야기의 본질까지 수정했다면 그림 형제 민담집은 오늘날처럼 국경과 시대를 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은 계속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p176)
야코프에게 언어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으며 범행의 실마리를 찾는 것과 같았다. 문법은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야코프는 달랐다. 그는 언어에 내재된 법칙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요소라 생각했다. (p.180-181)
『독일어 문법』은 예전에 아무도 시도한 적이 없는 역작이었다. 야코프는 단순히 독일어의 역사만 연구한 게 아니라 게르만어 전체를 포괄하는 문법 규칙을 찾아 규명하려 했다. 고트어, 영어, 스칸디나비아어군 등 여러 언어를 살펴보며 현재 모습을 갖추기까지 언어가 변화하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논하는 등 언어학적으로도 한 획을 그었다.(p186)
야코프는 상아탑에서 홀로 연구만 하는 학자가 아니라, 현실의 움직임을 포착해 자신이 옛 자료에서 찾은 내용을 적용하고 싶어 하는 활동가였다. 『독일 법리 고사지』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실제로 필요한 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며 비춰 보는 거울 같은 책이었다. (p.210)
문학은 인간이 고고한 감정과 인식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도 훌륭한 방법이며, 어떤 민족이 거둔 정신적 수확물을 간직하는 보물 창고와 같다. 문학은 오직 하나의 단순한 수단만을 사용한다. 바로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이다. (p238) -빌헬름 그림, 괴팅겐 대학교 취임 기념 강의 ‘역사와 문학의 관련성에 대하여’ 중
창작물의 완전함으로 따지자면 야코프 그림의 독일어 문법서는 그때까지 감히 상상할 수도, 시도할 수도 없었던 책이다. 그 안에는 독일인의 ‘말의 영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야코프 그림만큼 언어를 본질까지 꿰뚫어 본 사람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깊이 언어의 비밀에 귀를 기울인 사람도 없었다. (p. 246)
학문은 진실을 가르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진실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 (p252)-야코프)
내가 이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이 행동이 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이 글이 다음 세대에 전해져, 후손들이 읽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는 한 스스로의 행동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263)-야코프
전승문학은 학문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학문 중의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승문학은 찬란한 태양 빛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침없이 달리는 철도 대신 부드러운 물결에 실려 여러 나라를 천천히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노래가 되어 너른 초원과 계곡을 찰랑찰랑 흐르는 작은 시냇물처럼 울려 퍼지곤 합니다.(315) -야코프, ‘인문학의 가치에 대하여’ 중에서
“최근 3세기 동안 쓰인 언어를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중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만 담으려 합니다. 이 작업에는 각 단어의 역사도 포함할 예정입니다.”라고 언급한 대목에서, 형제가 단순히 단어와 표현을 모은 책이 아니라 언어의 변화 과정까지 포함해 살아 숨 쉬며 변해 온 독일어를 담은 사전을 만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p. 316)
이미 제안된 제1조를 제2조로 바꾸고 그 대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1조로 추가하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모든 독일인은 자유로우며 독일 땅에 노예는 필요하지 않다. 외국에서 자유민이 아닌 사람도 이 땅에 머무르는 한, 이 땅에서 자유롭다.’라는 내용입니다. 자유가 더 강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입니다. (p. 329)-야코프, 1848년 첫 국민의회에서의 발언
70세가 가까워지자 야코프는 더 이상 사전을 자기 손으로 완성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빨리 완성하기 위해 더 서두르거나 작업 방침을 바꾸지도 않았다. 오히려 “집필 방침을 제대로 확립해 다음 세대에 유품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단지 사라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그림 형제는 사전을 만들며 독일의 갈라진 운명이 해결되지 않더라도, 언어와 역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힘을 굳건히 간직해 주기를 바랐다. (p. 342)
작가 토마스 만은 그림 형제의 『독일어 사전』을 두고 “숭고한 기획이자 어문학의 기념비”라고 언급하며, “이 사전은 단순히 찾아보기 위한 참고 자료가 아니라, 몇 시간이라도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라는 평을 남겼다. (p. 342)
젊을 때는 산책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고 오직 얻는 것뿐이지요. 걷는 동안에도 스스로 얻은 깨달음은 없어지거나 망가지지 않고 계속 남기 때문입니다. 외진 곳에 있는 작은 길을 지나 들판과 밭으로 나가면 걸음을 조금만 빨리 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나는 이런 것을 직접 경험해 보았습니다. 집에 있을 때 뭔가 고민되는 게 있다면 마치 소요학파처럼 걸으면서 깊은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고민이 해결되지요. (p. 363) 야코프, ‘노년에 대하여’ 중
야코프는 판례야말로 예로부터 법이 간직한 본래 모습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다. 언어와 문학에 이어 법제사라는 영역에서 새로운 연구의 금광을 찾은 것이다. 이 법제사 연구는 1863년 야코프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후속 연구자들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계속 진행되었고, 야코프가 집필한 『옛 판례집』 4권에 이어 1866년부터 1878년 사이에 총 7권짜리 책이 되었다. (p. 371)
가족들이 슬픔을 누르며 집으로 돌아와 야코프의 옷을 정리하다 보니, 주머니 속에 낡은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펼쳐 보니 먼 옛날, 야코프가 파리에서 카셀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잠시 외출하면서 남긴 쪽지였다. 평생 그 쪽지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고 간직했던 것이다. (p. 376)
『독일어 사전』 편찬 작업은 그 이후에도 그림 형제의 정리법을 충실히 따르며 계속 이어졌다. 각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가 작업을 이어받았다. 프로이센 국왕이 빌헬름 1세로 바뀌었을 때도, 그 이후 이어진 빌헬름 2세 정권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지고 나치 독일이 제3제국을 선포했을 때도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졌을 때도 작업은 중단되지 않았다.(377-8)
그림 형제의 이름은 민담의 세계에서도 불멸의 영역에 올랐다. 『독일 전설』과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마치 그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이들에게 친숙해졌다. 관련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어 아무리 읽어도 계속해서 새로운 주제가 끝없이 등장한다.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 자체가 마르지 않는 샘이 된 셈이다. (p. 379)
전설과 민담, 신화와 동물 우화 등 그림 형제가 남긴 전승문학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즐거움을 준다. 『독일 법리 고사지』와 『옛 판례집』은 법제사 분야 연구에 크게 공헌했고, 『독일 신화학』은 이후 민속학 연구의 지침이 되었다. (p.379)
오늘날 그림 형제는 여러 오독과 곡해로 인해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형제가 언제나 독일 통일을 바라며 민족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는 점, 이들이 남긴 업적이 우리에게 끝없는 지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실은 언제나 우리 발밑에 숨어 있다. 이것을 그대로 밟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파내어 드러낼 것인지는 각자 결정할 몫이다. 그림 형제는 우리에게 그런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p. 380)
전승문학이 이렇게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유는 분명 그것이 생명의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형태에 매우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 없이 사는 민족은 없다. 서아프리카의 흑인들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고대 그리스의 스트라본 또한 그리스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명확히 기록한 바 있다. (p. 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