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진화는 단순한 쪽에서 복잡한 쪽으로 변화한다. 예를 들어 단순한 단세포 생물은 복잡한 다세포 생물이 된다. 목이 짧았던 기린의 선조는 목이 긴 기린이 되었고, 기껏해야 개 정도 크기였던 조그마한 생물은 말로 진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고 단순한 풀보다 크고 복잡한 나무쪽이 더 진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반대다. 풀이 나무보다 훨씬 진화한 형태이다. 나무에서 풀로 진화한 것이다. _61쪽
생물이 지닌 다양한 삶의 방식에는 반드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 또한 그런 생명 활동을 하는 하나의 생물에 불과하다. 생물학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겉씨식물에서 속씨식물로 진화는 식물에게 있어 혁명적인 대사건이자, 속도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_63쪽
겉씨식물의 꽃가루는 바람을 타고 이동한다. 그래서 겉씨식물의 꽃은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 그저 바람에 날릴 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바람에 맡기면 수분의 정확도가 떨어진다. 그런데 곤충이 꽃에서 꽃으로 화분을 옮겨 주면 꽃가루가 확실하게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속씨식물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속씨식물의 진화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로 ‘풀’로의 진화다. _66쪽
애초에 인간의 뇌는 애매한 기관이다. 생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일이다. 주어진 목숨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살아남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어떤가. 우리는 때로 ‘사는 데 지쳤다’거나, 더 심할 때는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런 세포는 생물로서 실격이다. 뇌 이외에 ‘살고 싶지 않다’며 투정을 부리는 기관은 없다. 위장이든 심장이든 아무런 불평 없이 매일 살아 움직인다. _117쪽
그것이 생명이 하는 일이다. 몸의 모든 세포가 필사적으로 살고자 하는데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뇌세포는, 다른 세포들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 죽어 갈 운명인 손톱 세포조차 목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는 열심히 살아 있다. 그것이 생명이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세포보다 묵묵히 살다가 죽어 가는 손톱이나 머리카락 세포가 생명으로서는 훨씬 우월하다. 그럼에도 ‘뇌’는 우리 생명의 본질일까? _118쪽
우리의 뇌세포도 1년마다 바뀐다고 한다. 그렇다면 1년 전의 내 뇌와 지금의 뇌에서는 전혀 다른 세포들이 일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나 자신이라 믿고 있던 ‘지난해의 뇌’와 ‘올해의 뇌’는 전혀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뇌조차 죄다 바뀌어 버린다면 나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_121쪽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도 변화해야만 한다. 단세포 생물은 돌연변이로 유전자를 변화시키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짚신벌레는 다른 개체와 유전자를 교환한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일단 해체하고, 전혀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냄으로써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 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내기 위한 파괴가 ‘죽음’이다. 이렇게 생명은 스크랩앤 빌드scrap and build를 통해 변화해 나가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즉, ‘죽음’은 생물의 진화가 만들어 낸 발명인 것이다. _136쪽
유전자를 교환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것이 태어났으니 낡은 것은 사라진다. 그것이 ‘죽음’이다.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말처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몇천, 몇만 년 동안 복제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생명은 영원히 존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부수고 새로이 만들어 내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하나의 생명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죽고, 대신 새로운 생명에 깃든다. 그 새로운 생명은 또다시 자손을 남기고, 생명의 바통을 넘긴뒤 사라진다. 이 ‘죽음’의 발명으로 생명은 세대를 초월해 생의 릴레이를 이어 가며 영원해질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 생명은 ‘끝이 있는 삶’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_136-137쪽
하나의 세포 안에는 한 식물이 되기 위한 정보가 모두 담겨 있고, 그래서 어떤 세포라도 잎이든 뿌리든 온갖 기관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분화 전능성이다. 그러한 성질이 있어서 식물은 어느 부분의 세포를 채취해도 분열한 세포가 잎과 뿌리를 다시 분화시켜 식물이 재생될 수 있다. 식물은 다세포 생물이지만, 다세포 생물도 단세포의 집합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_145쪽
생물에는 종자 번식과 영양 번식이 있다. 자손을 남기는 ‘종자 번식’에는 죽음이 따른다. 우리 동물처럼, 암수가 있으며 아이를 남기고 죽음으로써 다음 세대로 생을 연결하는 방법이다. 암수의 성이 달라 ‘유성 번식’이라고도 한다. 반면 분신을 남기는 ‘영양 번식’에는 죽음이 없다. 스스로의 복제를 남기는 영양 번식은 단세포 동물과 마찬가지로 죽지 않고 그저 분열을 거듭하며 유전자를 남긴다. 암수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무성 번식’이라고도 한다. _154쪽
식물 입장에서는 죽는 번식도 죽지 않는 번식도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종자로 유전자의 복제를 남기든 클론으로 자신의 분신인 유전자의 복제를 남기든 어느 쪽도 상관없다. 나에게는 죽는다는 것이 꽤나 큰일이지만 식물들은 죽든 죽지 않든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식물에 있어 ‘죽음’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식물은 죽는 것일까? 식물은 살아가는 것과 죽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 죽는 데도 죽지 않는 데도 연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_155쪽
지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진화한 생명체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을까? 우주에서 발견된 생명체의 경우 ‘살아 있다’의 정의는 무엇이며, 무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살아 있다는 것은 ‘막이 있고, 신진대사 활동을 하며, 자기 증식하는 것’이라는 설명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생물의 정의에는 예외도 많고 모호한 부분도 많다. 생물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살아 있다’는 현상을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 우리는 늘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_158-159쪽
우리는 살아 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건 무엇일까? 사전에 따르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일까? 사전에는 ‘태어나 죽기까지 생존의 지속’이라 되어 있다. 결국 ‘살아’ ‘있다’는 것이겠다.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살아 있다는 건 뭘까. 생명이란 무엇일까. _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