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불안한 삶 속에서도
누군가의 곁이 되어주는 따뜻한 순간들
▶ 결핍 속에서 서로를 붙드는 이야기
결핍 속에서 피어난 연대와 위로를 그린 임회숙 소설가의 『그들 곁으로』가 출간됐다.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난쟁이의 꿈」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임회숙 소설가는 그동안 고단한 삶을 문학으로 고요하게 비춰왔다. 이번 소설집은 일상을 둘러싼 결핍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가운데 피어나는 연대와 위로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보육원에서 자라 홀로 아이를 키우는 수진, 장애를 안고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현수, 정부 지원금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디언 캔. 이렇게 결핍과 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우연히, 혹은 필연처럼 자신을 붙잡아주는 무언가를 만나며 삶의 방향을 다시 그려간다. 누군가의 작고 소심한 배려, 오래된 기억, 찰나의 깨달음. 이 작은 계기들은 다시 세계와 연결되는 길을 찾게 만든다. 임회숙의 소설은 그 과정을 단단하고도 따뜻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 서로에게 건네는 작은 연대의 순간들
표제작 「그들 곁으로」에서 보육원에서 자라 미혼모가 된 수진은 임대주택을 전전하다 바닷가 마을에 자리 잡는다. 주인집 여자가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말하자, 수진은 직장을 구하며 삶의 의지를 다진다. 어느 날, 아픈 아이를 맡기고 출근한 수진은 아이가 걱정되어 일찍 퇴근한다. 그런데 아이가 혼자 남겨져 있었다. 배신감을 느끼던 수진은 그날 밤 주인집 여자로부터 시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연락처가 없어 알리지 못했다는 말을 듣는다. 주인집 여자는 자신이 잘하는 게 없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불안하다고 털어놓는다. 수진은 그녀를 위로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이해와 연민이 싹튼다.
「한 줄기의 햇살」에서 현수의 아버지는 빛이 들지 않는 집이 동생을 열여섯 살에 천식으로 죽게 만들었고, 현수의 고관절을 부정교합으로 붙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공사 현장에서 일하며 창문을 내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현수는 아버지와 더는 함께 일하지 않지만 공사 중인 집에 무리를 해서라도 천창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상처를 가진 이들이 서로를 향해 건네는 사소한 행동이 고립을 끊고 연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 불안정한 삶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바라보다
「Lucky」의 종섭은 집 앞으로 다가온 산불을 보며 과거 철거 농성장의 불길을 떠올린다. 떠돌던 삶의 끝에 겨우 마련한 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는 필사적으로 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캔 이야기」의 인디언 캔은 자신을 미국에 수입된 한국산 바위다람쥐에 비유한다. ‘사막에 던져진 나바호족’이나 ‘한국이 아닌 곳에 던져진 바위다람쥐’는 모두 기억되지 않는 존재이다. 도토리를 구할 수 없어 사람들이 던져주는 초콜릿을 받아먹는 바위다람쥐처럼,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는 자신 역시 스스로 살아갈 힘을 잃은 존재가 아닌지 자문한다. 두 편의 소설은 삶의 기반을 잃은 인물들이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는 과정을 그린다. 터전을 갖지 못한 삶은 위태롭고 흔들리지만, 오히려 그 경계에서 자신의 생을 가장 선명하게 이해한다.
▶ 기억과 관계가 뒤늦게 의미를 되찾는 순간
「저 너머」는 임종을 앞둔 분순이 막내아들 종길을 기다리며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남편의 추락사, 빨치산의 방문, 종길의 신체적 특징 같은 굵직한 기억들을 한 겹씩 떠올리며 자신에게 닥쳤던 불운들이 완전한 불행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 분순은 비로소 자신의 삶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밤산책」에서는 꽃도매시장에서 추념 문구를 쓰는 화자가 ‘오늘부터,,,1’이라는 의뢰 문구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의뢰인은 오래전 100개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던 펜팔 상대가 민주화운동으로 복역 중이었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를 찾은 의뢰인은 이제 그가 입원한 병원으로 100개의 꽃다발을 보낼 예정이라 고백한다. 기억과 관계가 뒤늦게 새로운 의미를 찾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기억을 통한 재해석과 관계 회복은 과거와의 화해이자 현재를 살아갈 힘을 되찾는 계기가 된다.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고립과 결핍 속에서도 연대, 자기 이해, 기억 회복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임회숙의 서사는 거창한 기적 대신 삶의 균열 사이에서 피어나는 작고 단단한 변화를 비춘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다른 사람의 존재와 나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그들 곁으로』는 이 과정을 가장 조용하면서도 뚜렷한 방식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