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 씨, 우리 고생했는데 밥 한 끼 먹어야죠!” 사심이 없는 듯 경쾌한 말투, 기름기 짝 뺀 톤. 이성으로서가 아닌 고생한 조장으로서 건네는 건강한 제안. 한 학기 동안 생고생하면서 이 한마디 건네기 위해 켜켜이 쌓아온 발칙한 빌드업이 작동하는 첫 순간이었다. 누군가 말했었다. 제안은 거절을 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라고. 사람이면 이거 거절하기 매우 힘들다.
“먹어야죠! 제가 살게요!”
생각보다 너무 흔쾌히 수락하는 그녀였다. 그날 단둘이 저녁을 먹었고 그 이후로 난 그녀가 하고 있는 봉사활동, 토익 스터디, 공모전에 이르기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같이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치 나도 막 그런 활동들을 하려던 사람인 것처럼 필연을 가공해 나갔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100m 떨어져 있던 과녁은 어느새 1m 앞에 있다. 눈을 감아도 명중시킬 수 있는 거리. 지금이다. 과녁이 화살에게 다가가 꽂히는 타이밍!
2010년 12월 01일. 토익 스터디를 함께 끝내고 데려다주는 그녀의 집 앞.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씩씩하고 담백하게 고백했다. 살짝 당황한 듯 그녀의 손이 우물쭈물 꼼지락거리고 난 그 손을 냉큼 잡아버렸다. 우린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 ‘쏜살’같은 그녀가 향할 과녁 -
“너희들 여기까지 와서 왜 방 안에만 있어? 나와서 놀아”
“음... 그냥 좀 피곤해서”
“오늘 저녁에 할로윈 파티하니까 나와서 즐겨!”
“그래 고마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파티를 즐길 생각은 없었다. 여행을 위해 잘 다니던 직장까지 퇴사하고 호기롭게 나왔는데 정작 와보니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져왔던 노트북도 고장 나고, 음식도 입에 안 맞고,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사용하는 숙소도 영 어색하고 불편했다.
처음 알았다. 내가 이렇게 ‘쫄보’인 것을. 한국에서는 무엇이든 먼저 손들고 자처하는 적극적인 스타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주저하고 머뭇거리지? 뭐가 문제인 거야? 영어 때문인가? 외국 사람들 기세에 눌린 건가? 뭔지 모르겠지만 굳어서 침대 밖을 나오려 하지 않는 나였다. 변비에는 관장약이 직방이듯 이런 나에겐 그녀가 있었다. 2층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가 나에게 던진 한마디가 나를 일어나게 했다.
“찬이야? 쫄았냐?”
“뭐래? 쫄긴 누가 쫄아! 그냥 시차 적응이야”
“그럼 오늘 저녁 파티 가보자”
“그... 그래 가보자 외국 애들 노는 거 한번 보지 뭐”
그녀의 도발에 억지 참석한 저녁 파티를 시작으로 난 차츰차츰 여행자로서 낯섦을 익숙함으로 변환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 Hi Strangers -
“정인아? 너 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 줄 거야?”
“글쎄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럴 줄 알고 내가 생각했어. 잘 들어. 올해 12월에 내가 너에게 프러포즈를 할 거야. 딱 1년 남았지? 1년간 충분히 생각해! 알겠지?”
“지금 프러포즈를 예고하는 거야?”
“응! 올해 12월에 난 네가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프러포즈를 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그동안 신중히 생각하고 나의 제안을 선택할지 말지 결정하면 돼. 중요한 건 거부해도 괜찮다는 거야!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좋으니까!”
“그래 어디 한번 해봐”
나의 아이디어는 1년간 최선을 다해서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그 이후 모든 결정은 정인이가 할 수 있도록 ‘책임 전가’ 시키는 것이었다. 노력은 내가 할 테니 판단은 네가 해라 마인드가 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대한민국 지도를 펼쳤다.
1년은 12개월이니까 12회를 나누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뛰어가는 ‘국토 종주 프러포즈’. 운동신경이 없는 나에게 유일한 강점이자 취미는 ‘오래달리기’다. 하루에 30km 이상은 달릴 수 있으니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계획이었다. 예를 들어 1월에 서울 광화문에서 수원까지 달렸으면 2월에는 지난달 달리기를 마친 지점인 수원에서 다시 달리기를 이어 나갔다.
1년간 시간이 날 때마다 쉬는 날을 이용해서 달리고 달렸다. 준비물은 튼튼한 두 다리와 카메라 그리고 ‘우리 결혼하자’는 글자가 적힌 미니 현수막. 겨울에서 시작해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달렸다. 길었던 우리의 연애 기간만큼이나 길고 험난한 프러포즈의 여정도 어느새 종착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 난 1년간 약 620km를 달렸다. 오로지 그녀에게 당당하게 프러포즈할 순간을 위해.
- 프러포즈 예고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