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이는 고선지 부대가 고선지와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을 가졌던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원래 전투 잘하기로 유명한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부대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고선지 부대는 이때 험준한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파미르 고원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중간에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나라의 그 누구도 파미르 고원을 넘으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선지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로마인의 혼을 빼놓았던 것처럼,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토번은 당나라 군대가 설마 파미르 고원을 넘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차에 고선지 군대가 갑자기 군사 기지인 연운보(連雲堡, 현 파키스탄 동쪽의 사르하드)에 나타나자 혼비백산했다. 결국 토번은 제대로 된 대응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연운보를 빼앗기고 말았다.
-36~37쪽 〈고선지, 세계사의 주역이 된 고구려 유민 출신 장수〉 중에서
신라의 경주와 개운포는 1만 2,0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기나긴 비단길의 동쪽 끝이었다. 서역인들이 신라에 왔다는 사실은 이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역인들은 9세기 말부터 이런 사실을 기록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중국의 동쪽에 한 나라(신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이 공기가 맑고 부유하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곳(신라)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서 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로 만든다. 그들은 또 스스로 옷을 짜서 내다 판다.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에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신라의) 주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질병도 가장 적다.”
-58쪽 〈삼국시대의 무역 대국, 신라〉 중에서
을지문덕은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을 하면서 “만약 군사들이 물러가면 임금을 모시고 행재소에 나가 빌겠다”고 말했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에 속아 철수를 시작해서 7월에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라는 곳에 이르렀다.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무렵 고구려군이 갑자기 기습해왔다. 우왕좌왕하던 수나라 군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는데, 적장 신세웅까지 전사할 정도였다. 기록에 따르면 겨우 살아남은 군사들은 450여 리의 긴 거리를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달려 도주했다고 한다. 그냥 앞만 보고 마구 달아났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30만 5,000명이었던 수나라 육군이 요동성 밖에 이르렀을 때는 겨우 2,700여 명만 남았으니 참패도 이런 참패가 없었다.
양제는 더 이상 싸워봐야 고구려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는 우문술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쇠사슬로 묶어서 퇴각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제2차 전쟁도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게 됐는데, 이것이 우리 고대 전쟁사에 길이 빛나는 ‘살수 대첩’이다.
-82~83쪽 〈고․수 대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중에서
독립군 전사들은 하루 종일 굶으며 싸워야 했다. 인근 마을의 아낙네들은 치마폭에 밥을 싸서 빗발치는 총알을 무릅쓰며 산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독립군 전사들은 밥 먹을 틈조차 낼 수 없었다. 아낙네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한 덩이 두 덩이 독립군의 입에 넣어주어야 할 지경이었다. 이때 독립군에게 밥을 날라주었던 이 마을은 뒷날 일본군의 보복으로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고, 동포들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독립군은 독립 전쟁에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북로군정서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崔麟杰)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기관총을 스스로 자신의 몸에 묶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일본군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공격은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관총 탄환이 다 떨어지자 최인걸은 맨몸으로 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142쪽 〈불멸의 청산리 대첩〉 중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세계 역사상 가장 방대한 역사서이다. 중국에도 한 왕조에 대해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자세하게 기록된 실록은 없다.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베트남 등 유교 문화권 국가에서는 모두 실록을 작성했지만, 이들 실록들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하면 아주 간략한 편이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다른 나라의 실록들은 모두 국왕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유일하게 국왕이 그 내용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민감한 내용도 많이 실려 있다.
이런 원칙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은 다른 어느 나라 실록보다 가장 충실하게 기록되었다. 무려 500여 년에 걸친 왕정 기록이 하나의 체계 아래 기록된 예도 세계 역사상 드물기 때문에 일찍이 국보 제13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과 더불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68쪽 〈기록 문화의 백미, 《조선왕조실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