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교수일수록 강의 중에 화면 클릭하고 휘리릭 설명하고 오르락내리락, 정신없어 죽겠다. 천천히 해주세요, 하기엔 좀 쪽팔린다. 외국인인 내가 꼭 백 퍼센트 다 알아들어야 하나, 그러고 지나간다. 그저 익숙해지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아직도 살날이 많은데, 지금 이것저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십 년 후에는 정말 모든 게 어리바리한 뒷방 늙은이가 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요 며칠 헤매다 문득 든 생각은, 나이 든다는 것은 느려진다는 것이다. 씁쓸하지만, 그래도 내 젊은 시절도 너희들만큼 찬란하고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희망으로 부풀어있었던 때가 있었느니, 얘들아, 늙어서 좀 어리바리하다고 흉보지 말거라.
그런데 요즈음 느끼는 건데, 진짜 마음먹기에 달린 건지, 내 머릿속에서 단어가 술술 빠져나간다던 생각이 없어졌다. 뇌세포가 살아나는지, 한번 본 단어가 잘 생각나기도 한다. 앗싸, 청춘이여, 아직 너는 젊구나!
몸이 약한 사람들이 회의론자가 되는 게 아닐까.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날씨도 안 좋은 스웨덴에 가서, 약한 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여왕을 가르치는 게 힘들어 죽었다는 데카르트를 생각하면서 동병상련의 느낌이 든다.
그다음 시간에 스피노자를 미리 읽고 갔더니 들을 만하다. 교수가 한없이 떠들어 대는데 90%는 대부분 그걸 그대로 읽는다. 자신이 만든 거라 거의 외우고 있다. 내가 한번 읽었던 내용을 쭉 그대로 듣는 거니까 듣기 훈련도 하는 것 같고, 그대로 읽는 거라도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 그런 걸 알 수 있으니까 괜찮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포레스텔라는 마침 얼마 전에 불후의 명곡에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커버했기 때문에 전체를 틀었다. 미리 3분을 더 요청해놓고 13분에 마쳤다.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 2분 전에 알람이 울린다.
예상대로 반응은 아주 좋았다. 내가 발표하는 중에 학생들이 와우, 케이팝, 그러면서 많이 감탄했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강형호가 극고음을 내는 부분에서는 헉, 하면서 놀라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리고 예상치 않았던 재미있는 반응도 있었다. 알록달록 예쁜 티를 입은 포레스텔라 네 명의 사진을 넣었는데, 얘네들이 좋은 대학에서 교육도 잘 받았고 잘 생기고 성격들이 아주 좋아서 딸 가진 엄마들의 장래 사위감이라고,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자 사람들이 순간 와 웃으면서 아주 재밌어했다. 그래서 '나보고 이 중에서 고르라면 아주 행복할 텐데요.' 했더니 또 웃는다.
샌프란시스코 거리는 관광객이 넘쳐나는 만큼이나 거지들도 넘쳐난다. 깡통 같은 걸 들고 구걸하는 사람들,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 스타벅스 앞에서 문을 열어 주며 잔돈푼을 달라는 사람, 다양한 인종들만큼이나 구걸하는 모습도 가지가지다. 지나칠 때면 온갖 악취가 진동한다. 거리에서도 소변 냄새가 많이 난다.
젊은이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이년 전쯤 대학생이 된 제자 찬혁이를 만나서 점심 사주고 대화한 적이 있다. 식사 후에 카페에 갔는데, 나는 겨울이라 따뜻한 차를 주문하는데 얘는 빙수를 먹겠단다. 그때 누가 나에게 젊음이란? 하고 물었다면, 한겨울에도 빙수를 먹는 것, 이라고 답했을 거다.
미래가 길게 열린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내 마음도 밝아진다. 아직 세상을 모르고 천진하지만 그래서 희망이 열려있는 듯한 나이. 아, 이래서 젊음이 좋은 거구나... 물론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오는 그런 상황은 잠시 잊고 말이다.
이 여교수는 실력도 있고 사람이 참 매력적이다. 수업용 ppt도 잘 만들고 강의 내용이 알차다. 이 내용을 어느 명문대에서 강의해도 반응이 좋을 거다. 그래서 이 교수 강의를 따라다니며 듣는 학생들도 많다. 나 역시 다음 학기에 이 사람 강의를 또 들을 거다. "범죄와 일탈" 이라는 강의인데 처음에는 제목이 별로 끌리지 않았는데, 몇몇 학생들이 강력 추천을 한다. 당신의 시각을 바꾸어줄 강의라고 한다.
오늘 시험이 끝나고 나서 교수랑 잠깐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점심식사를 한번 같이 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주 반색을 하며 좋다고 한다. ㅎㅎ 기분 좋다. 그런데 내가 대접을 하겠다고 했더니 아직은 학기 중이니까 밥값은 각자 내기로 하잖다. 아하, 김영란법은 없어도 여기도 이런 건 신경을 쓰는구나.
죽음의 사회학을 수강하며 내가 여기 오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이 강의에서는 좋은 책들도 읽었지만 좋은 비디오도 많이 보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벨기에의 안락사에 관한 것이었다. 유럽은 미국보다도 안락사에 아주 허용적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말기병 환자에게만 안락사가 허용되고 미성년에겐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벨기에에서는 육체적인 고통 외에 정신적 고통도 안락사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미성년자도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다.
어떤 출판사 사장님 말씀이, 자기 부인이 내 블로그를 보더니 자기도 외국에 공부하러 나가고 싶다고 한단다. 그래서 “돈 있겠다, 보내시지요,” 했더니 자기가 부인을 내보낼 용기가 없단다. 하긴 한국 남자들은 대부분 혼자서 생활하는 걸 겁내거나 불편해하지. 모임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내가 나다니는 것보다 남편이 그걸 동의하는 게 더 대단한 듯이 말한다.
가끔 나무가 보이는 바깥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 내겐 아주 소중하다. 전철역도 가깝고 안전하고 홈리스도 거의 없다. 여기서 두 블록만 내려가면 집세가 많이 내려가는데, 문제는 안전하지 않다는 거다. 좀 더 내려가면 샌프란시스코의 우범지대인 '텐더로인'이 있는데 밤에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곳이다. 폭행, 강도, 마약 등이 흔하고, 때로는 총기 범죄도 발생한다.
CNN 앱을 다운 받았더니 온통 코로나 얘기라, 너무 자주 보면 안 되겠다 싶었다. 시체를 넣은 백이 거리에 방치되고 있다는 둥 대책도 없이 안 좋은 뉴스만 많이 나오고, 갑자기 가게 문 닫고 직업 잃은 사람들, 트럭 운전해야 먹고 사는데 일이 끊겼다고 울먹이는 인터뷰 등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은 뭔 일이 터져도 정부 욕하고 난리 치는 게 없다. 어느날 갑자기 행정명령 내리면 끝. 우리나라 같으면 생난리 치고 인터넷이 시끌벅적할텐데, 말없이 따르네. 상황을 타개하고 싸우려는 그런 게 참 없달까. 그저 갑자기 재앙이 닥친 걸 정부가 어쩌겠느냐. 정도로 얘기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한국의 발 빠른 코로나 대처 상황을 보면서 이들이 우리의 '빨리빨리'라는 단어를 보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저 한국이란 나라는 뭐지? 하면서, '빨리빨리'는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랑 연관되던 아주 부정적인 단어인데 그 단어를 가지고 한국의 긍정적인 현상을 분석한다니 참 흥미로웠다.
내가 준성이 엄마를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학교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신 거 같아요. 늘 데리고 있는 자식이라면 덜 했을 텐데... 아침에 따뜻한 밥 한끼 못 차려주는 아들이라 늘 마음이 짠했는데, 학교에서도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달려오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 엄마의 얼굴과 눈빛에서 그 강렬한 분노와 독기가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했던 표정이 풀리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우리 딸이 이모에게 보낸 카톡은 이런 내용이었다. "이모, 혼자서 할머니 간병하느라고 많이 힘들지? 내가 멀리 있어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그래도 할머니가 많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이야. 그게 다 이모가 극진히 간호한 덕분일 거야. 할머니도 이모 같은 딸이 있어 참 행복하실 거야. 나도 이담에 가족이 아프면 이모 같은 딸이 되고 싶어. 이모, 힘내. 파이팅. 사랑해." 그리고는 하트를 뿅뿅 날렸다.
아, 이 아이는 갈등을 이렇게 해결하는구나. 남의 마음속에 들어갈 줄 아는구나. 이 아이는 나와는 아주 다른 능력을 지녔구나. 이런 생각이 들며 엄마와 나, 그리고 우리 딸로 이어지는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중환자실은 내게 의외의 경험을 선사했다. 몸이 아프니까 생존의 문제 외에는 모든 것이 멀리 있었다. 숨만 차지 않았으면, 산소호흡기만 뗄 수 있었으면, 몸을 옆으로 뉘어서 잘 수만 있다면, 머리를 좀 감을 수 있다면, 이런 작은 소원들로 머리가 가득 차 있어 다른 고차원적 사고를 별로 안 한 것 같다. 가끔씩 내 인생의 몇몇 사건들이 휙휙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예전 일들에 대해 반추할 에너지가 없었던 것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알음 앓이를 하지 말라는 말이 저절로 실천된 듯하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서도 삶을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면 욕심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내가 이 세상을 진짜로 떠나갈 때 나는 마지막으로 어떤 일들을 떠올릴까, 궁금하기도 하다.
내 인생에는 최고의 찬사가 세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우리 딸이 일곱 살때내게 했던 말, “엄마가 웃으면 코스모스가 확 피어나는 것 같아.” 두 번째는 고1 때 내가 담임했던 성수의 말. 성수는 초등학교 때 해외 주재원인 부모님을 따라가서 아메리칸 스쿨에 몇 년 다닌 적이 있었는데 자기 엄마한테 이러더란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내가 아메리칸 스쿨에서 만난 선생님들 같아요. 생각이 활짝 열려있어요.” 그리고 마지막 찬사는 내가 50대쯤에 30대 어떤 남자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다. “저의 와이프도 교사인데요. 저는 이 사람이 선생님처럼 나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당차게 살다가도 나 역시 간혹 인생에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다든가, 허무한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 이때 이 말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 찬사가 계속 나를 설레게 하려면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이 웃고, 젊은이들과 더 많이 소통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주 천천히 나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