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관광지 이면에 감춰진
태국의 정치 현실
태국은 한국인에게 대표적인 여행지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2025년 10월, 시리킷 왕대비의 서거로, 국가애도기간에 따라 주류 판매가 축소되고, 전 국민에게 검은 옷 착용이 사실상 강제되며 관광객들 또한 이에 주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관광지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정치적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태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곳의 권력 구조와 정치적 갈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터뷰로 만나는 태국 민주주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태국의 민주주의 운동과 청년 정치 세대의 목소리를 조명한 책이다. 저자 이정우는 2020년과 2024년, 태국 헌법재판소가 진보정당을 연달아 해산시킨 사건에 주목했으며 두 시기 시민 반응의 극명한 차이를 연구하기 위해 태국 청년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이 책은 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와 미래, 청년들의 정치 참여 양상을 생생히 기록했다.
▶ 진보정당 해산과 거리의 시위: 2020년과 2024년의 차이
태국 왕실과 군부는 오랜 기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치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유지해왔다. 농촌 유권자의 지지를 받으며, 왕실에 대적하는 대안으로 부상한 정치인 ‘탁신 친나왓’의 등장 이후, 2000~2010년대 태국 정치는 왕실을 지지하는 보수주의 세력(옐로 셔츠)과 탁신을 지지하는 세력(레드 셔츠)의 충돌으로 점철되었다.
이 구도 속에서 등장한 아나콧마이당(미래전진당)은 젊은 세대의 열렬한 지지 속에 ‘오렌지 정당’으로 불리며 개혁의 상징이 되었으나, 2019년 총선 이후 정치보복을 거쳐 2020년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해산되었다. 이에 분노한 청년들은 거리로 나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아나콧마이당 인사들이 재창당한 까우끌라이당(전진당)은 2023년 총선에서 제1당으로 약진했으나, 군부 및 왕실의 반대로 정권 수립에 실패했고 2024년 다시 해산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2020년과 달리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고, 저자 이정우는 바로 이 2020년과 2024년의 차이에 주목하였다. 4년 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책에서 분석한다.
▶ 태국 청년 세대의 정치 참여, 청년들의 슬픔・분노・희망
현재 태국 청년 세대는 민주주의를 둘러싼 가장 역동적인 주체이다. 저자는 여러 청년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며, 그들의 슬픔과 좌절, 분노, 그리고 희망을 생생히 기록했다. 이 책에는 태국의 젊은이들이 현 태국의 정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여당과 야당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등이 담겨 있다.
정치적 압력에 의해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태국 운동가들의 세력 기반이 약화되고 있는 지금, 이 기록은 중요하다. 현재 운동가들은 ‘왕실 모독죄’로 인해 감옥에 갇히거나, 이를 피하기 위해 망명을 간다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강요받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저자에게 태국은 관광을 위한 장소가 될 수 없었고, 민주주의를 위해 친구들이 싸우고 있는 현실의 공간이 되었다. 저자는 집필 과정과 그 이후에도 여러 방식으로 태국의 운동가들을 지원해왔으며, 이번 책의 출간 또한 그 연대의 일환이다.
저자는 태국 민주주의 수호 운동을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웃 국가 시민들과의 연대는 자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될 것이고, 민주주의를 초국가적으로 사유할 때, 더 넓은 지평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태국 형법 제112조, 왕실모독죄를 둘러싼 싸움
태국 민주화 운동의 핵심에는 ‘왕실모독죄’(태국 형법 제112조)가 있다. “국왕, 왕비, 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한 자는 3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조항은 왕실의 절대적 권위를 법으로 보장하며, 오랫동안 왕실에 대한 비판조차 허용하지 않는 금기 영역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2020년, 태국 젊은 세대는 그 침묵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저자의 인터뷰를 도운 보조연구원부터 인터뷰이까지 다수의 참여자가 이 죄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거나 복역 경험을 갖고 있었다.
저자는 왕실을 향한 질문이 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것을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마지막 성역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해석한다. 태국 청년들은 왕실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민주주의가 성숙해진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무엇에 관해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가. 『인터뷰로 만나는 태국 민주주의』는 태국을 비추는 거울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사각지대 또한 성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