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 난 자리마다 피어나는 인간의 아름다움
그 조용한 빛을 담은 도시의 단편들
사회 곳곳의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의 서사를 드러내 보여주는 소설가 황경란이 두 번째 소설집 『아름다운 단편』을 출간했다. 황경란은 첫 소설집 『사람들』에서 신문의 연재글 형식을 빌려 사회 주변부의 존재를 집요한 시선과 섬세한 표현으로 살폈다. 신작 『아름다운 단편』의 ‘단편’은 쪼개진 조각을 이르는 말로, 온전하지 않은 파편의 모습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각각의 존재를 이른다. 저자는 이들을 ‘아름다움’으로 호명하며 상처와 결핍으로 조각 난 삶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을 섬세하게 포착해온 황경란은 이번 작품집에서 그 시선을 한층 더 깊이 확장시킨다. 산업단지와 재개발지, 청소년 쉼터와 공장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이루는 무수한 삶의 단면은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엮인다. 『아름다운 단편』은 각기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미세하게 연결되는, 단편들의 아름다운 공명과도 같다.
▶ 도시를 이루는 수많은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 조각
조각 난 채로 연결된 각각의 삶들
「오늘의 철수」의 율은 행정복지센터의 소음 가득한 자리에서 일하며 언젠가부터 넘치는 것은 왼쪽으로, 부족한 것은 오른쪽으로 단어를 분류한다. 춥고 더운 자리에서 매일같이 억울함을 감춘 채 일하던 율은 어느 날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그는 청소년 쉼터에 입소한 철수를 만난다. 율은 철수에게 오른쪽 왼쪽으로 분류된 말을 들려주고, 철수는 율에게 매일 오늘의 자신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묻는다.
표제작 「아름다운 단편(斷片)」은 앞선 작품의 철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철수는 해일이 운영하는 작은 프레스 공장에 다니며 임신한 선아와 함께 지낸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에 다니지 못하지만, 한방에 누워 하루의 일과를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나눈다. 철판을 프레스로 자르는 것은 작은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철수는 함께 일하는 사장 해일을 닮고 싶고, 일에 있어 더욱 발전하고 싶다. 기계에 잘려나간 해일의 세 손가락마저도 철수에게는 아름다운 조각이다.
「우리 집 아래층에 할머니가 산다」는 귀신을 보는 한 아이가 소중한 존재와 이별하는 과정을 그린다. 지우는 은하빌라로 이사 오던 날 아래층에 사는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가 바람을 타고 날아갈 것 같아 할머니의 허리를 붙잡은 지우. 그렇게 한 달이 지나, 할머니의 죽음이 밝혀지고, 빌라 사람들은 귀신을 보는 아이라며 지우를 향해 혀를 찬다. 이 세상과 저세상의 차이를 볼 수 있는 지우는 점차 할머니와의 작별을 연습한다.
원도심의 주택가를 배경으로 하는 「붉은 밤」은 최 노인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신축 아파트의 2층에 사는 최 노인은 아내를 잃은 후 베란다에서 담장 하나를 두고 선 유치원을 관찰한다. 앞선 작품에 등장한 고등학생 커플과 바닥을 바라보며 걷는 아이가 최 노인의 앞을 지난다. 길고양이와 새의 배설물로 불편을 겪자 동네 사람들은 유치원 앞의 나무 탓을 하고,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기로 결정한다. 최 노인은 세상과 단절된 채 젊은 자신의 생을 되짚고, 잘리는 나뭇가지들을 보며 죽기로 결심한다.
▶ 변해가는 도시의 풍경 속 잊힌 이들이 붙잡으려 하는 꿈과 기억
『아름다운 단편』은 이처럼 도시라는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변해가는 도시의 풍경처럼 그 속의 사람들도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며 이동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황경란은 시선을 돌려 이 세계를 완성하는 또 다른 구성원들을 응시한다. 이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하지만 저마다 꿈을 품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엄마를 알까요?」의 ‘나’는 어느 날 양어머니에게서 흑백사진 한 장을 받는다.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가 있다. 양어머니는 그 여자가 ‘나’의 친어머니임을 밝힌다. 그 후 ‘나’는 사진을 반복해 들여다보며 여자의 웃음은 진짜일지 질문한다. 시간이 흘러 ‘나’는 사진이 찍힌 장소로 향한다. 폐허가 된 거리, 버려진 흔적들 속에서 그는 자신이 그곳에서 태어났는지, 버려졌는지 묻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웃음을 다시 마주한다.
「나에게 필요한 밤」의 성태는 산업단지와 재개발을 앞둔 빌라촌을 오가며 택배를 나른다. 그의 목표는 산업단지에 이어 고가교 건너 들어설 아파트 단지를 자신의 구역으로 만드는 것. 밤늦게 마지막 배달을 마치러 가던 중, 현수는 고가교 위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을 본다. 현수막에 적힌 “당신에게 필요한 낭만적 하루”라는 말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읽었던 한 소설을 떠올리게 하지만, 제목도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현수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기억을 되살리려 한다.
「안녕 키티」의 칸은 ‘창고 안에 쌓인 것들이 곧 돈이 될 거야’라는 사장의 말을 믿고 쉼 없이 하루 종일 일한다. 여자친구 키티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칸은 창고 안에 쌓인 것들이 돈이 될 거라는 사장의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몇 번의 태풍이 지나간 후 그해의 마지막 태풍 ‘키티’가 찾아온다. 그러나 사장은 태풍 대비는커녕 칸에게 더 많은 상자를 창고에 쌓으라고 지시하는데…
「돌의 기억」의 주인공 석훈은 한 지방 도시의 박물관 건립 공모전에 참여한다. 그의 발표 주제는 ‘기억과 소리’로, 신라의 음악가 우륵을 상징으로 내세운다. 작업을 진행하며 그는 자신이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를 되짚기 시작하고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아버지가 보내오던 편지를 떠올린다. 돌과 돌의 기억에 관한 아버지의 편지들. 공모전이 진행될수록 석훈은 아버지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음을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