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구멍에 들어간 건 순전히 타의였다. 거부할 수 없는 일종의 의례이고 불가항력적이어서 나뿐만 아니라 누구 하나 원치 않는 까닭에 타의일 수밖에 없다. 공의 구멍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명확지 않다. 혹자는 인간의 심판자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이 세계를 창조한 조물주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모두 신빙성이 없는, 지어낸 얘기에 불과하다. 왜냐면 인간만의 얘기이니까. 나처럼 인간이면 누구든 구멍을 피할 수 없다. 다만 구멍에 갇힌 기간이 각자 다를 뿐이다. 구멍에 갇힌 건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그리고 가당찮은 욕심 때문이었다. 방종에 가까운 욕구를 채우다 못해 다음 세상에서 다시금 살고 싶은 욕심, 그러한 욕심을 갖지 않았다면 쇠공에 갇히는 고통은 겪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처음 구멍에 들어갔을 때 벽이 말랑하고 몸이 잠기는 듯한 아늑함, 그렇지만 입구가 닫히고 봉해지는 순간, 암흑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과 속박이 나의 모든 것인 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9쪽)
남자가 술 단지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저만치 갈 즘, 노인이 내게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몰라요.” 하고 위로 같지 않은 위로의 말을 하더니, 대뜸 “혹시 밭에 기둥 같은 게 서 있는 걸 봤어요?” 하고 물었다. 내가 밭 가운데 선 기둥을 떠올려 “봤습니다.”라고 간명하게 대답하자 노인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리고 낙담하듯 “그렇군요.”라며 고개마저 떨구었다. 나로선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물론 노인이 기둥의 용도를 아는 탓에 이토록 낙심천만 하는 것일 테지만 예사롭지 않은 건 분명했다. 내가 ‘무슨 까닭이냐’고 물어보려는 차에 노인이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기둥을 봤다면 나나 그대에게 나쁜 징조예요. 여자들이 누굴 선택할지 모르지만 질긴 고기를 선택했으면 합니다. 나는 늙었고 그대는 오랜 인고 끝에 막 이곳 세상에 왔으니 더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59~60쪽)
“글쎄요.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닐 거예요. 물론 그자가 진짜 ‘미스터 하’의 시자에게 들었다면 맞겠지요. 이건 내 추측이지만, ‘미스터 하’를 저세상이나 이 세상이나 그 어디에서도 만났다는 사람이 없으니 ‘미스터 하’는 가상의 존재일 수 있어요. 그래서 ‘미스터 하’를 들먹이는 진짜 시자들이 ‘미스터 하’이면서 아닌 양 호도하는 게 아닌가 해요. 내가 ‘미스터 하’의 성소에서 목격한 인물도 분명 여성이었으니까요. 이런 점들에 미뤄봐서 ‘미스터 하’가 동물들 나라의 총집사라는 게 빈말 같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그 총집사 역시 ‘미스터 하’로 인식되는 진짜 시자일 수도 있지만……, 또 내가 ‘덴 하루’에 살 때 들은 말 중에 ‘강 저편에 강아지 나라가 있고, 그 강아지 나라의 출입자를 통제하는 건 여성이다’라는 얘기와도 일맥상통하고요. 아무튼 정우 씨가 ‘미스터 하’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덴 하루’에 가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덴 하루’에는 ‘미스터 하’의 실체를 알고 있는 재사(才士)가 필시 있을 거예요. 여기 선민의 도시보다 억압이 덜해 자유롭기도 하고요. 누가 압니까? 정우 씨가 ‘덴 하루’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크로스 라이프’ 주민들의 얼굴 기형을 고칠 처방을 얻게 될지…….” (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