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이 휙휙 지나갔다. 다가오는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렸다. 저렇게 깜빡거리다가 언젠가는 빛을 잃을 터였다. 지금 뭘 할 수 있겠어. 결국 누군가 알게 되겠지만 역시 뭘 하지는 않겠지. 세상도 그대로일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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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주 나중에, 몇백 년이 지난 후 월지의 바닥을 준설하거나 다시 발굴하는 날이 오지 않겠냐고. 그때 이 스테인리스 조각이 발견되면 우리 사랑 이야기를 알게 되지 않겠냐고, 한 조각 남겨진 이야기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 사랑이 우리 시대의 사랑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너와의 사랑은 누구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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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치요. 햇빛을 아주 못 받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받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위에서 흘러 내려오거나 땅속으로 흘러든 빗물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 전만 못하겠지요. 뭐,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그래서 잡촌데. 잡초가 제일 강하다 안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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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네가 없었어, 두 번을, 한참 동안 가만히 찾았는데 네가 보이지 않더라.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어. 널 처음 본 그 순간처럼 네 모습이 그냥, 아무런 예고 없이 보였으면 했는데, 보이지 않더라고. 내 속에 네가 없는 거지. 네 잘못은 아니야. 그냥 느닷없는 거, 느닷없는 마음, 내 마음 때문이야. 원래 사랑이 그런 거잖아. 느닷없는 것. 우리도 느닷없이 시작했잖아. 끝내는 것도 느닷없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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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개월이 지난 십이월 이십칠 일 악마의 연기, 소행성 L2001은 돌연 사멸했다. 애초에 지구를 향해 돌진하지도 않았고 그러겠다는 의지도 없었던, 실제 연기, 꼬리에 유해 성분이 있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소행성 L2001은 불꽃 하나 없이, 우주를 울리는 굉음 하나 없이 사멸했다. 누군가는 고온의 연기에 둘러싸여 스스로 증발해버린 것이라 말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악마의 연기가 소멸되기를 기원했던 전 인류의 손가락질이 이루어낸 쾌거라 말하기도 했다.
------------161-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