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이별 의식도 없이 손때 묻은 갈색 업라이트 피아노를 보내 버렸다. 오랜 시간 교감을 나누었던 악기였다. 상유에게는 악기, 그 이상이었다. 마음에 꼭 들어오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셀 수 없을 만큼 건반을 눌렀고, 마침내 감정의 접점이 일어나는 순간에 악기는 생각했던 그 소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온 정성으로 건반 위에 쏟았던 마음들이 이제 모두 쓸려 사라져 버렸다. 상유는 배 속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벽에 몸을 기댔다. (30~31쪽)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들의 어깨 위에는 이상할 정도의 풋풋함이 유월의 햇살처럼 넘실댔다. 저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인생의 찬란함. 유월의 연한 잎사귀 위에 빛나는 햇살 같은 찬란함이 저들의 어깨 위에서, 머리칼에서 빛이 나지만 정작 그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그 사이에 찰나의 기억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 (115쪽)
-나 빨리 돈 벌어야 돼.
상유는 정욱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과고 가면 자립할 거야.
미래 계획을 말하던 정욱의 진지한 음성이 생각났다. 과학고 진학 때까지 알바를 최대한 많이 할 것, 그리고 중학교 졸업하면 작은집에서 독립할 것.
정욱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교실 안에서도 정욱은 뭐든 먼저 했고, 그러면 반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같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뭐든 말없이 해낼 거라고 믿어 버렸던 그 마음이 싫었다. (154~155쪽)
마침내 상유의 순서가 되었다. 검정 바지와 검정 셔츠, 그리고 검정 구두 차림의 상유가 무대에 나타났다. 신화의 숲에서 튀어나온 한 명의 아도니스가 성큼성큼 무대 가운데로 걸어오고 있었다.
상유는 무대 중앙, 피아노 곁에 서서 객석을 향해 단정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곤 곧바로 피아노 의자에 앉더니 잠시 의자 높이를 조정하고 건반 위에 양손을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순식은 〈월광〉의 3악장 선율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첫 소리를 기다렸다. 드디어 상유의 손가락이 첫 음을 짚었다.
‘어, 이상하네.’
3악장의 첫 음이 아니었다. 연주자는 때에 따라 옥타브를 건너뛰는 모험을 실험적으로 시도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도입부에서 그런 시도는 위험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경연 대회가 아닌가. 〈월광 소나타〉 3악장, 그 긴박하게 서두르는 도입은 절대 아니었다. (185~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