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정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 바보였어. 솔직하지 못했던 그날의 모습도, 시리도록 아팠던 내 첫사랑도 이제 나 대신 네가 간직해줘...’
좁은 새장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듯 자유로운 기분이 들 때쯤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19살의 크리스마스 날,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시원하게 외쳤다.
“여보세요? 좋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난 나의 사랑을 지키고 내 마음을 따라갈래. 우리 내일 만나자. 메리 크리스마스!”
뒤늦게나마 내뱉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후련했다. 그날 이후로 그곳은 첫사랑의 추억을 품고 있는 비밀의 보물섬이 되었다. 온통 J 군의 기억으로 가득 채워진 그곳은, 이제 흙으로 메워져 더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날 만났던 출렁이는 물결의 인사와 반짝이는 물방울의 위로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에게 먼저 속삭여주던 고마운 보물섬은 아마도 내 안에서 영원히 존재할 것 같다.
- 비밀의 보물섬 (김미선) - 중에서
하늘이 빙그르르 돌다가
똑하고 떨어진다
코를 훌쩍이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는다
차가운 바람이
속삭이며 스며든다
그 속에서 눈을 감고,
잠시 세상과 멀어진다
이 작은 고통 속에도
회복의 시간이 있다
몸은 다시 일어나고,
겨울은 지나가리라
감기는 지나가고,
결국 따스한 봄이 온다.
- 감기와 회복 (유온유) -
연말이 되니 이 말이 떠오르네요
배우 김혜자 님이 말씀하신
등가교환이라는 말이요.
나의 귀중한 것을 희생하는 대신
얻어지는 값진 대가
시간은 무수히 빠르게 흘러가고 있고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계속 흘러갑니다
지금 이 새해를 맞이하는 당신
너무 수고 많았으니
지금의 위치에서 힘들면 한 걸음 쉬고,
시곗바늘이 많이 바쁘다면
작년보다 더 열심히 사는
이번 해를 진행하시길 바랍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의 전공과 현재의 나
시험을 앞두고 있는 취준생의 나
한없이 무거운 가장의 무게감의 나
독박 육아로 육체적 정신이
너무 힘든 나를 위해서요.
열심히 하다 보면
반드시 터널은 뚫리게 되어있습니다.
다소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이죠.
- 새로운 터널의 시작 (이지현) -
해가 기울고 조각달이 뜬다
가로등처럼 늘 같은 자리에서
너의 까만 눈동자를 기다린다
견디는 건 꽃무늬 빛바랜 벽지와
규칙적으로 째깍대는 초침 소리
스며드는 달빛에 까무룩 잠이 들고
너의 숨소리와 손길이 닿으면
낱자마다 깃발처럼 휘날리던
전생을 꿈꾼다
시소처럼 올라가는 입꼬리와
할미꽃처럼 툭 떨구는 눈물방울
함께 울고 웃었던 영원을
그늘진 너의 쓸쓸한 뒷등과
활자에 기대는 비스듬한 마음
마침표를 매만지는 손끝을
너의 모든 표정을 사랑해
들키고 싶지 않은 표정과
골똘히 상념에 잠긴 표정
나를 사랑하는 표정과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난 표정을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오래된 연인의 마음처럼
내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지
너는 나의 마지막 페이지를
부러 남겨둔다
영원히 영원히 끝나지 않도록
기도하던
너의 떨리는 손끝을 기억해
- 전지적 책 시점 (정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