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잘 모셔 드렸냐?”
빌라의 관리소장님이 어느 결에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어색하게 웅얼거리는 해찬이 옆에 서서 소장님은 텃밭을 바라보았다.
“대충 갈무리해 뒀다. 아주머니가 정리해 두셨었지만. 건강해 보이셨는데……, 갑자기 세상을 뜨셨어.” 장례식장에서 내내 들었던 말이다. 씩씩했던 할머니의 죽음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_15p
“복수초가 피면 겨울은 안녕이지. 곧 봄이 올 거야!”라며 할머니는 소란스럽게 주방 살림을 뒤집어 놓았었다. 텃밭 농사가 바빠지기 전에 살림을 정돈하는 일이 해찬이네의 봄맞이 행사였다. 떠들썩하던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텃밭이 사라지는 건 역시 아쉬워.” 해찬이는 빨개진 손을 주머니에 넣고 가슴을 폈다. _19p
소장님은 뽑아 놓은 풀 무더기를 헤쳐 보여 주었다. 아까 본 싹들이 모조리 그 안에 섞여 폭삭 시들어 있었다. “아! 소장님, 그거 제가 기다리던 새싹인데…….” “너 언제부터 잡초를 키웠냐?” 소장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목을 젖히고 껄껄껄 웃었다. “잡초라고요?” 몸도 마음도 힘든 요즘 할머니의 씨앗이 싹을 틔운 거라는 생각으로 기뻤는데, 손끝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게다가 잡초와 새싹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소장님은 그런 해찬이를 보고 머쓱한 듯 모자를 벗어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_47p
화려한 꽃이 만개한 정원들을 보며, ‘내 정원은 언제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애가 탔고, 아름다운 꽃들을 고르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정원사는 아픈 식물까지도 세심하게 돌보고 있었다. 해찬이는 문득 자신의 정원에 있는 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_50p
“나에게 지난 일 년은 정원에서 식물을 가꾼 특별한 한 해였어. 씨앗을 심고 꽃을 피워 내는 건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무엇보다 기뻤던 건 내가 거둔 걸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한 때였어. 어쩌면 정원을 통해 할머니가 나한테 알려 주신 것 같아._125p
정원은 고요했다. 해찬이는 엊저녁 은재가 서 있던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별들이 왕관에 박힌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오른쪽 하늘에 몇 개의 밝은 별빛이 눈에 띄었고, 희미한 별빛들도 자잘하게 흩어져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저렇게 빛나고 있었어. 하늘에는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고, 땅속에는 봄을 기다리는 씨앗과 구근이 잠들어 있어.’ _1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