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4월이면 제주 하도리 바닷가에서는 진혼제가 열린다. 처음에는 육지에 있는 하르방의 가족과 제주에 있는 할망의 가족이 모여 지내던 조촐한 행사였다. 이십여 년을 내려오면서 4 ·3 때 무고하게 죽어간 모든 이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가 되었다. 자연히 여름에 지내던 것을 사월에 지내게 되었다. 거기에는 육지와 섬이 따로 없고, 좌와 우가 없으며, 경찰과 민간인이 없었다. 칠십여 년 전에 제주에서 있었던 그 참혹한 사건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이 모두가 피해자였다. 이 진혼제는 그들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다. (「노을의 기억」, 11쪽)
다 끝났다. 꿈속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 이 길뿐이다. 벌써 저기 고향이 보인다. 어머니가 치마폭에 옥수수를 감싸안고 출출할 때 먹으라고 건넨다. 광식이 입안에서 달디단 옥수수의 알이 터진다. 아련한 고향의 맛이다. 편하다. 진즉에 고향으로 갈 걸 그랬다.
(「꿈속의 고향」, 117쪽)
관리사무소에 가기 전에 진희는 저녁 뉴스에서 화곡동 빌라에 살고 있던 세차 여자의 소식을 들었다. 카메라가 집 안을 살짝 보여주었는데 여자가 세차할 때 입던 물색이 바랜 파란 등산복 겉옷이 빨래건조대에 널려 있었다. 빌라 왕에게 전세금을 뜯긴 사람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보이고 그 위로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 쳐도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다. 한평생 살아간다는 일이 왜 이리 살기가 힘든가.’라고 쓴 세차 여자의 유서가 공개되었다.
(「슈퍼문이 뜬 밤에 서래섬을 돌다」, 141쪽)
돌이켜 헤아려보니 선생님과 공부한 기간이 가을부터 겨울까지 육 개월 남짓하다. 그 육 개월간 나는 등단하고 「노을의 기억」을 쓰고, 선생님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시고, 제자들은 영원한 제자가 되었다.
짧은 공부 기간이었지만 소설은 사회상이 반영되어야 한다며 선생님은 누누이 강조하셨다. 나는 어떤 소설이든지 사회의 모순된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내려고 했다. 『노을의 기억』에 실린 작품들 속에도 사회상을 반영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작가 후기」, 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