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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적 부정의


  • ISBN-13
    979-11-6873-138-7 (93100)
  • 출판사 / 임프린트
    도서출판 오월의봄 / 도서출판 오월의봄
  • 정가
    23,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5-01-20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미란다 프리커
  • 번역
    유기훈 , 정선도
  • 메인주제어
    철학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철학 #도덕철학 #인식론 #윤리학 #서양철학 #교양철학 #인식적부정의 #부정의 #사회운동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3 * 210 mm, 368 Page

책소개

성폭력에 대한 비판적 언어의 부재로 고통받는 여성, 자기 정체성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성소수자, 인식적 능력을 마땅히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인, 불신에 둘러싸여 증언을 묵살당하는 흑인…… 이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사례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이 겪는 부당한 피해의 작동 원리를 설명할 언어를 오랫동안 갖추지 못해왔다. ‘편견’, ‘고정관념’, ‘무시’, ‘차별’과 같이 지나치게 포괄적인 언어는 이들이 겪는 인식적 층위에서의 부정의injustice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를 보인다. 대화나 발화, 증언 등을 포함해 무언가를 알고 전달하는 인식적 활동에서 이들이 어떻게 배제되는지, 어떤 부정의를 겪는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피해를 겪은 당사자들은 그 부당한 경험을 스스로 선명히 이해하고 언어화하지 못한 채 침묵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도덕철학과 사회인식론을 연구하는 미란다 프리커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이와 같은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고유하게 인식적인 유형의 부정의”를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에게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인식적 능력(무언가를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능력) 혹은 누군가가 지닌 지식의 주체로서의 능력에 범해지는 잘못을 ‘인식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로 개념화한다. 이 개념은 철학, 인식론, 사회학, 문학비평, 페미니즘 등 여러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에도 강력한 언어와 사유를 안겨주었다. 그 덕택에 비로소 우리는 그 부정의에 뚜렷한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증언적 부정의’와 ‘해석학적 부정의’라는 두 유형으로 분류되는 인식적 부정의는 우리 일상을 이루는 두 가지 인식적 실천, 즉 ‘타인에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앎을 전달하는 행위’와 ‘우리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이해하는 행위’에 어떤 윤리와 정치가 깃들어 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목차

추천의 말・4 

한국어판 저자 서문・7 

들어가며・10 

서론・17

 

1장 증언적 부정의 31 

1. 권력 34 

2. 정체성 권력 41 

3. 증언적 부정의의 핵심 사례 47

 

2장 신뢰성 경제에서의 편견 69 

1. 고정관념과 편견적 고정관념 71 

2. 편견 없는 증언적 부정의? 89 

3. 증언적 부정의의 잘못 92

 

3장 증언에 대한 덕 인식론적 설명을 향하여 119 

1. 변증법적 위치에 대한 스케치 121 

2. 책임 있는 청자? 131 

3. 유덕한 지각: 도덕적인 것과 인식적인 것 140 

4. 감수성 훈련하기 155

 

4장 증언적 정의의 덕 163 

1. 편견을 교정하기 165 

2. 역사, 비난, 그리고 도덕적 실망 186

 

5장 증언적 정의의 계보학 201 

1. 진리의 세 번째 근본적 덕 203 

2. 지적-윤리적 혼종으로서의 덕 220

 

6장 원초적 의의: 잘못에 대한 재검토 235 

1. 두 종류의 침묵 237 

2. 인식자라는 개념 258

 

7장 해석학적 부정의 265 

1. 해석학적 부정의의 핵심 사례 267 

2. 해석학적 주변화 277 

3. 해석학적 부정의의 잘못 292 

4. 해석학적 정의의 덕 306 

 

결론・317 

미주・321 

참고문헌・344 

옮긴이의 말・353 

찾아보기・360

본문인용

정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정의가 표준이며 부정의는 불행한 일탈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틀린 것일 수 있다. 또한 이는 정의를 먼저 이해하고, 이를 통해 항상 잔여적으로 부정의를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인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해의 경로는 때로 그 반대일 수 있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부정의,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인식적 활동 영역에서의 부정의이다. -11~12쪽

 

사회적으로 위치지어진 개념화 방식에서 출발하게 되면, 우리는 권력, 이성, 인식적 권위의 상호의존성을 추적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의 인식적 실천에 중요한 윤리적 특성들을 드러낼 수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는 인식적 행위가 어떻게 더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더 정의로워질 수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2쪽

 

나는 부정의의 정상성에 초점을 맞출 때 철학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가지 이점은, 부정의에 저항하기 위해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9쪽

 

통제라는 발상을 사회적 권력 개념의 중심에 둠으로써 적절한 비판적 성찰이 가능해진다. 즉 우리는 권력이 작동하는 모든 곳에 대해 누가, 무엇이 누구를, 왜 통제하고 있는지 질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41쪽

 

화자는 청자의 정체성 편견으로 인해 신뢰성 결여를 받게 될 경우에,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증언적 부정의를 겪는다. 따라서 증언적 부정의의 핵심 사례는 곧 정체성-편견적 신뢰성 결여identity-prejudicial credibility deficit가 된다. -66쪽

 

[어떤] 주어진 경험에 대해 누군가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반적인 이해와 스스로의 내밀한 감각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느끼는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라고 여기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면, 이는 세계를, 혹은 적어도 세계의 관련 영역을 이해하는 그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흔들리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증언적 부정의와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부정의 역시 이차적인 실천적 불이익뿐 아니라 이차적인 인식적 불이익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95쪽

 

서평

우리의 앎에는 어떤 정치와 윤리가 깃들어 있는가? 

부정의에 저항하는 인식적 실천은 가능한가? 

 

사회적 권력과 정체성, 앎의 얽힘을 탐구하는 우리 시대의 고전

 

불신에 둘러싸여 증언을 묵살당하는 흑인 

성폭력에 대한 비판적 언어의 부재로 고통받는 여성 

자기 정체성을 표현할 언어가 없는 성소수자 

인식적 능력을 마땅히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인 

……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차단당하는 모든 이들

 

“시간이 흐른 후 미래 세대가 21세기를 돌아보며 철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들을 꼽는다면, 《인식적 부정의》 역시 단연 그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성폭력에 대한 비판적 언어의 부재로 고통받는 여성, 자기 정체성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성소수자, 인식적 능력을 마땅히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인, 불신에 둘러싸여 증언을 묵살당하는 흑인…… 이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사례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이 겪는 부당한 피해의 작동 원리를 설명할 언어를 오랫동안 갖추지 못해왔다. ‘편견’, ‘고정관념’, ‘무시’, ‘차별’과 같이 지나치게 포괄적인 언어는 이들이 겪는 인식적 층위에서의 부정의injustice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를 보인다. 말하자면, 대화나 발화, 증언 등을 포함해 무언가를 알고 전달하는 인식적 활동에서 이들이 어떻게 배제되는지, 어떤 부정의를 겪는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피해를 겪은 당사자들은 그 부당한 경험을 스스로 선명히 이해하고 언어화하지 못한 채 침묵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도덕철학과 사회인식론을 연구하는 철학자 미란다 프리커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이와 같은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고유하게 인식적인 유형의 부정의”를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에게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인식적 능력(무언가를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능력) 혹은 누군가가 지닌 지식의 주체로서의 능력에 범해지는 잘못을 ‘인식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로 개념화한다. 이 개념은 철학, 인식론, 사회학, 문학비평, 페미니즘 등의 분야를 비롯해 여러 사회운동에도 강력한 언어와 사유를 안겨주었고, 그 덕택에 비로소 우리는 그 부정의에 뚜렷한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프리커가 제시하는 ‘인식적 부정의’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말과 증언을 통해 자신이 가진 앎/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사람이 부당하게 낮은 신뢰성을 부여받을 때 발생하는 증언적 부정의testimonial injustice와,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집단적 자원의 결여로 발생하는 해석학적 부정의hermeneutical injustice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일상의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 인식적 실천, 즉 ‘타인에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앎을 전달하는 행위’와 ‘우리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이해하는 행위’에 깃든 윤리와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이해를 확립할 때, 인식적 부정의에 저항하는 앎의 윤리 또한 모색할 수 있다.

 

정체성 권력: 사회적 정체성을 둘러싼 상상적 공조

 

프리커는 인식적 부정의의 첫 번째 유형으로 ‘증언적 부정의’를 다룬다. 증언적 부정의란 말 그대로 화자와 청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증언 및 담화에서 발생하는 부정의를 가리키는 용어로, 청자가 화자의 말에 낮은 신뢰성을 부여함으로써 화자가 부당함을 겪는 상황을 포괄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화자가 당하게 되는 불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왜 발생하는가? 어떠한 이유/맥락에서 청자는 화자의 발화에 낮은 신뢰성이나 불신을 보내게 되는가? 또한 어떤 이들이 이런 부정의를 주로 겪는가? 

이 일련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프리커의 권력론부터 살펴보아야 하는데, 위와 같은 증언적 부정의의 상황에서 작동하는 것은 결국 모종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프리커는 권력을 기본적으로 ‘사회적 권력’으로 이해하고 정의한다. 사회적 권력이란 하나의 능력으로,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사회적 행위자로서 사회 세계 전반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렇듯 능력으로서의 사회적 권력은 적극적으로도, 소극적으로도 작동할 수 있으며(주차단속원이 가진 주차 위반에 대한 벌금 부여 권력이 실제로 누군가를 적발해 벌금을 부여할 때도 작동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도 운전자들의 주차 행위에 상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행위를 통해 실현되지 않을 때도 존재한다(누군가 단속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주차 규정을 어겨 권력이 일시적으로 작동하지 않더라도 그 권력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프리커는 이 권력이 특정 사회적 행위자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도 있지만(행위자적 권력), 행위자/주체 없이 순수하게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특정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행위를 통제하는 경우든, 사람들의 행위가 순수하게 구조적으로 통제되는 경우든 모든 사회적 권력은 사회적 통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즉 “누군가의 객관적 이익의 좌절”을 포함한다는 것이 사회적 권력의 고유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 프리커는 사회적 권력을 다음과 같이 개념화한다. “타인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실천적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위치지어진 능력.” 

다른 한편으로 프리커는 특정 행위자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에서도 권력은 이미 구조적 현상임을 명백히 한다. 이는 권력이 언제나 다른 사회적 행위자와의 실천적 공조에 의존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사회의 어떤 일이든, 그 일이 이뤄지기 위한 권력이 작동하려면 사회적 타자의 실천적 공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표를 현금화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은 은행과 같은 다른 여러 행위자와의 실천적 공조에 달려 있다.) 

그러나 프리커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런 유의 실천적 사회 공조라기보다는 상상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사회 공조이다. 상상적 사회 공조를 요하는 사회적 권력의 한 유형이 바로 정체성 권력이다. 따라서 이 권력은 어떤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공유된 상상적 개념화 방식에 의존하여 작동한다. 여성 혹은 남성이 된다는 것, 동성애자 혹은 이성애자가 된다는 것 등과 같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그런 집단적인 상상적 개념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젠더 역시 정체성 권력의 한 영역이다. 예컨대 젠더 정체성 권력은 남성이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따르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사용할 때 적극적으로 행사된다. 

 

증언적 부정의와 정체성 편견: 누군가의 말은 왜 불신되는가?

 

마지, 여자의 직감도 좋지만 팩트라는 게 있어.

―영화 〈리플리〉 중 허버트 그린리프의 대사

 

그렇다면 정체성 권력은 화자가 청자에게 일련의 지식을 전달하는 증언적·담화적 교환에 어떻게 관여할까? 프리커는 사회 구성원들이 상상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그 개념화가 다름 아닌 어떤 사안에 대한 ‘고정관념’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증언 교환의 상황에서 청자는 상대인 화자의 신뢰도를 자동적으로 평가하게 되는데, 이때 청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사회적 고정관념인 것이다. 즉 고정관념은 청자로 하여금 화자에 대한 신뢰도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휴리스틱heuristic(복잡한 문제를 빠르고 간단하게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험적이고 직관적인 접근법 혹은 규칙)이다. 정체성 권력은 이런 식으로 증언 교환의 메커니즘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그러나 고정관념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적절하며 신빙성 있는 종류가 아닌 그릇된 고정관념, 특히 화자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내재화하고 있는 고정관념이 문제가 된다. 이런 유의 고정관념이 작용할 경우, 청자는 화자의 신뢰성을 과도하게 낮게 판단하게 되고, 그 결과 [화자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식자knower로서의 화자의 능력을 그릇되게 훼손하는 윤리적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바로 이것이 증언적 부정의이다. 

여기서 우리는 증언적 부정의라는 개념을 좀 더 제한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청자의 잘못된 믿음이 비난할 수 없는 무고한 오류로 인해 발생한 한, 즉 그 믿음이 부도덕한 혐오나 인식적 부주의에서 비롯되지 않은 한 그것은 증언적 부정의가 아니라 단지 불운한 ‘인식적 실수’일 뿐이다. 프리커가 논하고자 하는 증언적 부정의란 곧 “청자의 오판에 윤리적으로 나쁜 점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는 증언적 부정의를 성립시키는 윤리적 독소ethical poison가 바로 ‘편견’임을 명확히 한다. 우리는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젊은 흑인 남성 톰 로빈슨에게서 그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백인 소녀 마옐라 유얼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는데, 배심원들은 그의 결백함을 입증해주는 여러 결정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적 편견 속에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 

프리커는 소설 속 톰 로빈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는 증언적 부정의의 핵심 유형을 한 번 더 식별해낸다. 개인의 삶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는 체계적인 부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단적인 편견에 의해 형성되어 삶의 특정 영역에 국소적으로만 영향을 미치는 부수적 부정의에 비해, 체계적 부정의는 “경제적·교육적·직업적·성적·법적·정치적·종교적 차원 등 사회 활동의 다양한 차원을 가로질러 대상이 되는 주체를 추적하는 편견에 의해 형성”되고 실제로 이처럼 개인의 여러 차원을 추적하여 작용한다. 인종적 편견이 톰 로빈슨을 증언적 유형의 부정의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여타의 부정의에 노출되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식의 추적 편견이 중요한 것은, 그 편견의 주된(어쩌면 유일한) 유형이 사회적 정체성과 관련된 편견(정체성 편견)이기 때문이다. 정체성 편견이 증언 교환에서 청자의 신뢰성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곧 정체성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체성 편견의 영향은 결국 “한쪽이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집단적 개념화에 의거해 다른 쪽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예컨대 지식 전달을 막는 등) 문제”로 나타난다. 이로써 우리는 증언적 부정의의 핵심 사례를 ‘정체성 편견적 신뢰성 결여’로 이야기할 수 있다. 

 

증언적 부정의의 해악: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다는 것

 

증언적 부정의의 가장 심각한 해악은 단연 청자가 화자에게 즉각적으로 행하는 잘못에서 발견된다. (증언적 부정의와 해석학적 부정의를 비롯한) 모든 인식적 부정의가 초래하는 해악은 그것이 인식자knower로서의 주체의 능력에 잘못을 범한다는 것이다. 증언적 부정의의 경우, 특히 지식/앎 제공자로서의 주체의 능력에 잘못이 범해질 때 발생한다. 우리는 합리성에 기반을 두는 이 능력이 인간 가치에 본질적인 능력이며, 인간성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발상에 매우 친숙하다. 따라서 누군가의 지식 제공자로서의 능력이 모욕당하거나 약화될 때 당사자가 깊은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억압의 맥락 속에서 권력자들이 권력 없는 자들의 그런 능력을 분명 훼손할 것이라는 점 또한 놀랍지 않은데, 이는 그것이 [힘없는 자들의] 인간성 그 자체를 훼손시키는 직접적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증언적 부정의가 그 능력에서 누군가를 모욕한다는 사실은 상징적인 권력을 부여하기도 하는데, 따라서 이때 당사자는 인식자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상징적으로 비하된다. 그들은 단순히 증언적 부정의라는 인식적 잘못 그 자체뿐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대우받는다는 것의 의미 또한 겪게 된다. 그렇게 비인간화하는 의미가 특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표현될 경우, 당사자는 깊은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 

인식적 훼손의 경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주체의 심리에 훨씬 더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프리커가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의 ‘마음의 확고화’ 모델을 경유해 이야기하듯, 마음을 확립하는 과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다. 이때 타인과의 상호신뢰적 대화는 마음이 자기 스스로를 확고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대화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정체성 또한 확립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우리는 증언적 부정의 현상의 중대한 의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증언적 부정의는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대화에서 어떤 주체를 편견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그가 자기 정체성의 본질적 측면을 형성하는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인종적, 정치적, 성적, 종교적) 집단 정체성으로의 소속이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가늠하는 데서 본질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우리 문화에서 이런 식의 배제와 주변화는 해당 주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뿐만 아니라 화자에게 작용하는 그와 같은 편견은 자기-실현적 힘을 발휘하기도 해서, 부정의를 겪는 주체가 바로 그 고정관념이 묘사하는 대로 사회적으로 구성되거나, 자신에게 작용하는 편견적 고정관념을 실제로 닮아가게 되는 일이 초래될 수도 있다. 이처럼 증언적 부정의는 결국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을 차단당하는 문제다. 

 

해석학적 부정의: 이름표가 부재하는 경험과 고통들

 

“우리는 이것에 관한 침묵을 깨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결정했어요.” 그들이 침묵을 깨고자 했던 ‘이것this’에는 이름이 없었다. 우리는 미묘하거나 미묘하지 않은 지속적 행동들을 모두 포괄하는 무언가를 원했어요. “누군가 ‘괴롭힘’을 떠올렸어요. 성적 괴롭힘! 우리는 즉시 동의했어요. 바로 그거였죠.”

―수전 브라운밀러의 회고록(In Our Time) 중 카미타 우드의 이야기

 

사회 세계에 대한 지식은 기본적으로 해석적인 것이며, 우리는 사물들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적 도구들을 갖는다. 그런데 만일 서로 다른 사회집단의 경험이 이 도구들에 불균등하게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어떤 집단은 그들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서 불공정한 불이익을 겪게 된다. 실제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이해는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는 공유된 해석학적 자원을 왜곡한다. 따라서 권력자들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이해의 틀이 마련되어 있는 반면,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로서는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잘 들어맞지 않는 의미들”밖에 없다. 이것이 프리커가 제시하는 인식적 부정의의 두 번째 유형, 즉 해석학적 부정의이다. 마치 “어두운 유리를 통해” 사회적 경험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여성운동의 역사는 프리커가 다루는 해석학적 부정의의 사례로 빼곡하다. 의식 고양의 방식으로서 ‘목소리 내기speak-outs’를 비롯해 그전까지 이해되거나 표현되지 못했던 경험들을 공유하는 일이 여성의 경험 상당수가 오랜 시간 모호하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 반응으로써 나타난 것이었음을, 여성운동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특히 수전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가 쓴 미국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회고록에서 우리는 기존의 해석학적 부정의를 극복하고 가려져 있었던 경험들에 대한 예외적인 해석에 도달한 이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집단적 해석틀에서 잘못 이해되었던 여성 우울증/산후 우울증의 경험을 밝혀내거나, 직장에서 당한 원치 않는 신체 접촉과 그 뒤 이어진 부적절한 차별적 대우에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으로 여성들은 가려져 있던 경험들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더듬어 찾아갔던 것이다. 

여기서 프리커는 우리가 해석학적 공백에 기여하는 배경적인 사회적 조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브라운밀러의 회고록에 담긴 부정의의 경험이 발생하던) 제2물결 페미니즘 당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무력한 지위에 놓여 있었으며, 바로 이 불평등한 권력관계로 인해 집단적인 사회적 의미가 생성되는 활동에 남성과 대등한 조건에서 참여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이러한 관행은 저널리즘, 정치계, 학계, 법조계 등의 요직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해석학적 불평등과 이중의 인식적 부정의: 최악의 시나리오

 

결국 누군가의 권력 없음은 그들이 해석학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하며, 이런 유의 불평등과 같은 것이 해석학적 부정의의 중요한 배경 조건을 제공한다. 성폭력 피해로 직장에서 고군분투해야 했음에도 해석학적 틀의 공백으로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그 경험을 정작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처럼, 사회적 경험의 중요한 영역에서 해석학적 참여가 불평등하게 이뤄질 때, 그 불이익을 겪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해석학적으로 주변화된다”. 그리고 이 주변화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강제된다. “해석학적 주변화는 구조적인 것이든, 일회적인 것이든, 언제나 권력 없음의 한 형태이다.”

프리커의 이런 분석은 해석학적 부정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로 우리를 이끈다. 집단적 해석 자원의 격차 내지는 해석학적 주변화로 인해 누군가가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서, 혹은 타인에게 그 경험을 이해받는 데서 불이익을 받게 될 때 발생하는 부정의. 증언적 부정의와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부정의 역시 부수적인 것과 체계적인 것으로 나뉜다. 만일 집단적인 해석 자원의 공백으로 누군가의 경험이 가려지게 된다고 할 때, 그것이 일시적인 형태의 주변화라면 그때의 해석학적 부정의는 부수적이다. (물론 부수적이라는 것이 윤리적으로 심각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면 동일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해석학적 주변화를 겪게 될 경우 그때의 해석학적 부정의는 체계적이다. 왜냐하면 이때 해석학적 주변화는 다른 사회적 주변화들과 관련되는 더 일반적인 취약성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언적 부정의와 달리 해석학적 부정의에는 (부수적이든 체계적이든) 범인이 없다. 다시 말해, 그 어떤 행위자도 해석학적 부정의를 저지르지 않는다. 해석학적 부정의는 근본적으로 일종의 구조적 차별로, 그 배경 조건은 주체의 해석학적 주변화다. 이러한 해석학적 부정의의 순간은 오직 주체가 스스로 혹은 대화 상대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려는 다소 암울한 시도 속에서 그 배경 조건(해석학적 주변화)이 실현될 때만 발생한다. 그리고 이 사실, 즉 해석학적 부정의가 대화와 같이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증언적 부정의가 해석학적 부정의를 심화할 수 있다는 암울한 가능성을 제기한다. 만일 화자가 사회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고 있는 경험을 대화 상대인 청자에게 설명하려 한다면, 그들의 말은 그 낮은 이해 가능성으로 인해 낮은 신뢰성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정체성 편견까지 작용한다면 상황은 더욱더 심각해진다. 

이처럼 우리는 작동 기제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인식적 부정의(해석학적 부정의와 증언적 부정의)가 서로 맞물릴 수 있는 경우를 고려해볼 수 있다. 이러한 곤경은 화자에게 인식적 부정의와 관련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된다. 브라운밀러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여성 카미타 우드Camita Wood의 이야기에서도 같은 시나리오를 떠올릴 수 있다. 그녀는 직장에서 한 교수로부터 지속적인 성적 괴롭힘을 당했고, 부서 이동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성적 괴롭힘’이라는 단어가 있어야 할 곳에는 해석학적 공백이 존재했고,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여성들과 한 세미나에서 만나 집담회를 갖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여기에 젠더, 인종, 계급에 관한 정체성 편견까지 더해질 경우, 그녀는 증언적 부정의에도 취약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와 같은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당연히 해석학적 부정의와 증언적 부정의 모두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신뢰성이 걷잡을 수 없이 하락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다. “발언 내용의 그럴듯하지 않음이 화자의 개인적 신뢰성을 과도하게 하락시키는 렌즈를 만들어내고, 이것은 다시 발언 내용의 신뢰성을 더더욱 하락시키는 렌즈를 만들어내며……” 이런 식의 악순환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자기 경험의 본질을 전달하려 했던 카미타 우드 역시 실제로 걷잡을 수 없는 신뢰성 하락의 상황에 수없이 부딪혔을 것임을 (회고록에 실린 에피소드의 행간을 읽어낸다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인식적 부정의를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증언적 부정의를 막기 위해, 다시 말해 증언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청자로서 기울일 수 있는 노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프리커는 이상적인 청자의 조건으로, 다양한 편견이 존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신뢰성 판단을 반성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증언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갱신하려는 노력을 언급한다. 즉 청자로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사회적 반성성을 제2의 본성으로 갖는 청자만이 좋은/유덕한 청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편견의 영향력을 보상할 수 있고, 그런 반성과 교정의 경험이 축적되며 점진적으로 나은 청자가 되어갈 수 있다. 따라서 예를 들면, 편견이 대화 상대(화자)에 대한 자신의 지각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반성적으로 자각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다. 

증언적 정의의 덕을 발휘하는 것은 해석학적 부정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해석학적 부정의는 이른바 ‘범인’ 없이 집단적인 해석학적 자원의 특징(그 자원 내에 발생한 공백)에 의해 발생하는 부정의이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대화와 같은 의사소통의 상황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해석학적 부정의에는 화자의 말을 편견 없이 신빙성 있게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단지 편견을 교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해석학적 주변화가 타인들이 이용하는 해석학적 도구에 이미 미친 편견적 영향”을 상쇄하는 방식으로 화자인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덕목이 그것이다. 이미 발생한 해석학적 자원의 격차는 청자가 화자를(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감소시키기에, 청자는 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며 다양한 해석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해석학적 정의의 덕은 대화 상대가 무언가를 의사소통적으로 이해 가능하게 만드려고 할 때 겪는 어려움이, 그것이 말이 안 된다거나 화자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집단적 해석학적 자원 내의 어떤 간극으로 인한 것일 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이나 민감성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덕한 청자라면 “화자가 표현하고자 애쓰는 해석이 만약 더 포용적인(구조적 정체성 편견이 없는) 해석학적 분위기에서 제시되었더라면 어느 정도로 말이 되었을지를 반영하는 신뢰성 판단”을 수행할 수도 있다. 

물론, 인식적 부정의를 막기 위해 우리가 청자로서 발휘해야 하는 이러한 덕들이 어떤 면에서는 다소 낙관적인 성찰일 수도 있다. 특히 해석학적 주변화는 “불평등한 사회적 권력관계의 산물”이기에, 우리가 유덕한 청자로서 할 수 있는 노력만으로는 근절될 수 없다는 점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변화를 위한 집단적 정치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인 한 명 한 명의 화자로서의 경험과 청자로서 갖게 되는 덕을 성찰하고 정교하게 다듬는 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실천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프리커가 논하는 인식적 정의의 덕들은 개인의 수준에서뿐 아니라 제도적인 수준(사법부, 경찰, 지방정부, 고용주)에서도 실현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우리 인식적 활동의 대부분이 사회 제도와 관련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런 기관들에서부터 인식적 정의가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소개

저자 : 미란다 프리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도덕철학과 사회인식론을 연구하는 영국 출신의 철학자. 사회적 정체성과 권력이 인간 행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관심을 가지고 인식론과 도덕철학의 경계 지대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뉴욕대학 철학과 줄리어스 실버 석좌교수이자 셰필드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뉴욕철학연구소 공동소장을 맡고 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런던 버크벡칼리지, 셰필드대학, 뉴욕시립대학 대학원센터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6년에는 브리티시아카데미 펠로우로, 2020년에는 미국예술과학아카 데미 펠로우로 선정되었다.
앎/지식에서의 권력과 부정의 문제를 새롭게 개념화함으로써 여러 사회운동에 강력한 언어와 사유를 안겨준 《인식적 부정의》(2007)를 통해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올랐다. ‘인식적 부정의’ 개념을 이 용한 광범위한 연구와 실천은 여러 분야에서 지금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저자 홈페이지: https://www.mirandafricker.com/
번역 : 유기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노들장애인야학 휴직 교사. 서울대학교에서 공학과 인류학, 의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법학과 의료인문학을 공부하며 생명과 의료, 장애와 정신보건을 둘러싼 법과 윤리의 문제를 고민해왔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및 종로구정신건강복지센 터에서 진료교수로 일하고 있다. 책 《아프면 보이는 것들》을 함께 썼고,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인식적 부정의》를 동료와 함께 한국어로 옮겼다.
번역 : 정선도
인식론과 (메타)윤리학, 도덕심리학이 교차되는 지점들에 있는 문제들, 특히 태도에 관한 규범들을 연구한다. 믿음의 윤리학에 관해 석사논문을 썼으며, 달리기와 스포츠 클라이밍을 좋아한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모토로 한국사회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돌아보며 급진적인 사상을 벼려내는 책을 내보자고 다짐하면서 2011년 첫걸음을 뗐습니다. 노동자, 장애인, 여성, 퀴어 등 소수자의 삶과 투쟁을 다루는 책들을 주로 출간합니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적 삶을 형성하는 중요한 정치적ˑ문화적ˑ사회적ˑ경제적ˑ생태학적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대안적 실천을 모색하는 책들을 꾸준히 출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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