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무도 경험해본 적 없는 미래 도시의 리얼리티는 대체 어떻게 살릴 수 있단 말인가. 장 감독은 율처럼 어딘지 모르게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22p 「잭오랜턴의 구멍」
“솔직히 계획이 다 무슨 소용인가. 어느 날 갑자기 폴이 집에 들어왔던 것처럼, 그러곤 갑작스럽게 죽어버린 것처럼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예측할 수 없는 마당에…… 그럼에도 간절히 바랐다. 기준은 율과 함께 오랫동안 잘 살고 싶었다.”
—36p 「잭오랜턴의 구멍」
“훌리오가 작정하고 떠났다는 생각을 할 때면 란은 심장이 다 울렁거렸다. 마음속 깊은 곳 저 아래, 외로움과 공허함으로 가득한 심연 한가운데로 나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암흑의 구렁텅이로 발을 한번 잘못 디뎠다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48p 「훌리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내면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간 뒤였다. 그는 출구를 알 수 없는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힌 채, 완벽하게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53p 「훌리오」
“하지만 파커도 모르지 않았다. 소중했던 존재가 떠나가는 순간을 지켜보는 건 결코 익숙해지기 힘든 일이란 것을.”
—73p 「훌리오」
“나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우려먹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우려먹었는지가 중요한 거겠……. 그때 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서둘러 백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96p 「지하철 정거장에서」
“창문에 비친 얼굴을 응시하며 어제 들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유순해 보였다는 말은 아마도 칭찬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을 것처럼 보였다는 뜻이겠지. 나는 어째서 조금은 제멋대로, 뻔뻔하게 굴지 못하는 걸까.”
—99p 「지하철 정거장에서」
“우리들이 계획한 건 끊임없이 뒤집히지, 의도한 바 운명과는 정반대로 가는지라, 우리 생각 우리 것이나, 그 결과는 아니라오.”
—103p 「지하철 정거장에서」
“내가 도저히 못 견뎌하는 무언가를 상대방이 고수하려 들 때, 우리는 어디까지 참아줄 수 있을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체념하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른 걸까. 아니 그런데 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108p 「작가의 말」
“사랑도 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떠나버릴 수 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상황이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를 받아들이는 일에 도무지 익숙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변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늘 궁금하다.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고, 무엇을 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109p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