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또 책을 낼 수 있을까요?” 푹신한 빈백에 앉아 손을 바삐 움직이며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어떠할지는 대략적으로 가늠이 갔다. “그럼요. 20대 때 냈으니까, 이제 30대에 내면 되겠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서 상상한 문장을 직접적으로 귀를 통해 들으니 포근함이 두 배가량 뛰었다. 무척이나 따뜻해서, 하마터면 오래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어질 뻔했다. “30대에는 좀 더 성숙한 글을 쓸 수 있겠죠?” 건너오는 끄덕거림이 위안이었다. 당신은 내가 가진 고민거리를 언제든 별것 아닌 일로 뒤바꿔주었다. 이러한 것도 마법이라 할 경우 과연 마법사가 아닌가, 바보 같은 농담을 건네려다가 말았다.
좋아하는 어른의 상이 뚜렷한 편인데 당신은 단언컨대 해당되는 면이 전부였다.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적부터 느꼈다. 어딘가 통달한 듯한 분위기, 감히 지나온 삶을 알고파졌다. 차곡히 내공이 쌓인 느낌이랄까. 당신 앞에선 구태여 눈치 볼 일이 없어 좋다. “제 앞에선 나긋해지는 것 같아요.” 정확히 나를 콕 집은 말이었다. 평소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경우 겉보기와는 달리 속 안이 잔뜩 경직되어, 일부러 더 활발하게 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이토록 좋고 편안한 사람을 만날 시엔 한껏 풀어져 부드러워지고 나른해지며 템포가 확연히 느려진다. 이게 가장 나답다고 여겨진다.
어느 날은 당신을 무척이나 닮고 싶어서, 당신이 하는 말마디들을 따라 하고 당신이 듣는 음악을 따라서 들었다. 그러하면 당신과 얼추 비슷한 내가 된 것 같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잇따라 고백하자니, 난 당신이 날 흠씬 귀여워하는 눈 맺음이 좋다. 정말이지 그 찰나마다 내 이야기를 하고픈 충동이 일어난다. 그간 겪어온 무수한 사연들을 남김없이 떠들어도 당신은 그저 날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결코 떠나지 않을 듯하단 착각에 해롱이게 된다. 그리고 착각이 부디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게 된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오래된 노래처럼.
- 오래된 노래처럼 당신을 좋아하고 -
그래서 난 날 행복하게 하는 법을 몰랐다. 어떠한 기쁨을 맞닥뜨렸을 시에도 이를 어떻게 행복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애를 먹었다. 행복은 내게 두려움이기도 했다. 행복할 경우 조만간 불행이 찾아올듯하여 불행해졌다. 행복은 아주 잠깐의 폭죽과도 같고 쉬이 꺼져 공허만을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불안했다. 행복이 달아날 게 미리 걱정되어 행복을 멀리했다. 행복하려 들 때면 모른 체 눈 가리고 아웅했다. 불행과 더 친했다. 우울 속 행복 찾기가 아닌 행복 속 우울 찾기란 친구의 문장을 오래도록 골몰한다.
쓸모없는 상념을 이만 접고서 만족감을 찾고자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나만의 불행에 빠져 애꿎은 것들에게 불행을 전염시키진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소소한 만족을 채워 행복을 조금씩 느끼는 연습을 해보자. 본인의 불행은 어쩌면 본인이 행복할 수 없단 강박 안에서 일어나는 걸 수도 있을 테다. 그걸 깨부숴야만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 벽 뒤에 숨어 달아나는 게 아닌 정면으로 돌파해야만 어떠한 것들은 비로소 대면할 수 있는 법이다.
되짚고 보니 행복이라 생각하여 거창했다. 행복을 만족으로 바꾸고 보니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것도 같다. 대단하고 거창하고 특별할 필요 없이 작고 귀여운 만족감들을 모아본다. 언젠가 내가 행복을 두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족을 기억하여 채워나간다. 그것들로 나를 기록한다. 오늘은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었다. 스타벅스에서 판매하는 하트 파이가 무척이나 맛있었다. 하트 파이와 라떼의 조합이 만족스러웠다. 버스를 몇 분 기다리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이밍이 맞아 바로 탈 수 있어서 대만족이었다. 오랜만에 본 동생의 얼굴이 좋아 보여 만족할 수 있었다.
가을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도록 잘 즐기다가 보내주려 한다. 사실상 사계절을 전부 타는 것 같다만 계절의 변화를 세심하게 느낄 수 있는 거라 치겠다. 우리의 계절을 만끽하며 나뭇잎 따라 달라지는 마음의 상태를 보듬어주고 신경을 기울여주자. 몸도 마음도 포동포동 살이 찐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 고개를 들어 바라봐줘야 할 때이다.
- 사랑은 정이고 행복은 만족이라면 어떻게 생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