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이었고, 대중에게는 호기심이자 신종 사업 아이템이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새로운 시장과 산업이었고 할리우드라는 신대륙을 탄생시켰으며, 단순한 출연자를 연기자나 스타로 만드는가 하면, 제작 노동자이던 감독을 예술가와 창작자로 변모시키거나, 독립 제작사들의 경쟁을 촉발하고, 다양한 일자리와 체제를 창출하며 세계 굴지의 거대한 기업들을 일으켰다. 베르그송과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에게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었으며, 그 자체가 자본이자, 종교였으며, 여러 갈래의 사조가 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산업과 예술의 영역 안에서 학문이 되었다. 이처럼 영화는 모든 시대의 다채로운 의미였다. 이 복잡다단한 과정 안에 대체 얼마나 놀라운 뒷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운동과 시간을 눈앞으로 당겨온 역사
‘영화의 역사’라고 하면, 영화가 처음 발명되던 1895년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보다 선행해야 할 것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인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제일 먼저 영화로 만든 서사, ‘이야기’를 먼저 꺼내 들기 일쑤다. 하지만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하여 선보인 것이 과연 ‘이야기’일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태어나는 인간처럼, 영화도 탄생할 때 ‘이야기’를 입고 태어나지 않았다. 당시 뤼미에르가 준비한 상영회는 마치 우리가 실수로 휴대전화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눌러 기록된 아무 의미 없는 10초짜리 영상 따위였다. 자, 그때의 영화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에서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영화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날, 뤼미에르의 상영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야기’를 감상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친 무의미한 움직임을 보았다. 시간과 운동이 기계로 인해 되돌려지고 눈앞에서 재구현되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여기에 서사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의 영화다. 이날은 운동과 시간을 다룬 최초의 사건이자, 인체의 시지각 작용을 구현한 과학기술로서의 영화가 발명된 날로 인류사에 기록된다. 그 뒤로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저 이 의미 없는 움직임을 보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움직임’을 재현함으로써, 영화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눈앞의 ‘현상’을 인류에 들이민다. ‘현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영화를 즐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개념이다. 저자는 서사를 걷어낸 자리에 바로 ‘현상’이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철학자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사유를 관통하는 물질과 시간, 움직임의 의미들을 영화를 통해 설명하고, 기술의 혜택에 익숙해져 놓치고 있던 21세기의 우리에게 ‘현상’의 낯섦을 일깨워 영화의 실체를 드러낸다.
한편, 오락물이자 상품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대중의 관심과 돈의 흐름에 크게 좌우되어, 문화나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채 줄곧 서커스의 묘기처럼 소비되었던 것 역시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끈질긴 생명력과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점차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유럽과 신대륙을 넘나들며 편집과 미장센, ‘이야기’를 시도하고, 배우와 감독, 장르와 스타일, 사조를 탄생시키는 것은 물론, ‘할리우드‘라는 제국과 굴지의 기업들을 일으키며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한다.
영화의 정의, 그리고 움직임과 현상
Movie, Cinema, Film. 우리가 누구나 ‘영화’라고 해석하는 단어다. 하지만 한 단어로 설명하기에 영화는 제법 많은 정의를 가졌다. 1894년,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구현해 낸 짧은 ‘움직임’도 영화고, 제작자들이 다루던 필름도 영화며, 서사를 가진 하나하나의 작품들도 다 영화다. 이제껏 이 의미들을 ‘영화’라는 한 단어에 뭉뚱그려 사용해 온 것이다. 영화의 개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에 영화가 가진 이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할 단어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영화라는 한 단어로 두 개념을 통칭하면서 모든 관심을 영화 속 ‘이야기’에만 쏟는다. 서점의 영화 코너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책들로 가득하고, 심지어 영화 서적과 영화들을 예술로 분류한다. ‘영화 속 이야기’라는 문장을 뒤집으면 ‘이야기 바깥에 영화’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에디슨과 뤼미에르 영화의 차이점도, 둘 중 뤼미에르만 영화의 발명가로 인정받는 것도, 에디슨이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몰락했는지도 모른다. 극장이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고, 영화의 중심지가 프랑스가 아닌 미국인 까닭도, 영화가 개척기 신대륙의 땅을 밟고 동부에서 서부로 간 이유도 모른다. 도대체 ‘할리우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당시의 제작, 배급은 어떤 구조였을까? 감독과 배우라는 직업은 또 어떻게 생겨났을까? 영화가 천덕꾸러기 한량의 문화였다고? 유럽의 영화는 모르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팬이라고? 어원으로 보면 ‘움직임’ 자체이자 매체의 일종이지만, 이 시대의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매체로 만든 ‘이야기’를 영화로 정의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영화의 의미가 다르다면, 당연히 영화의 역사도 의미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화사나 영화 서적들은 미학과 연출을 중심으로 작품의 서사를 해석하고 연대별로 분류하는 것에 치우쳐 있다. 이 책은 ‘움직임’에서 역사를 다시 시작한다. 영화의 역사란 곧 영화의 특수성의 역사다. 최초의 ‘영화’는 분명히 기계나, 상품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움직이는 이미지’였다는 것. 영화들은 모두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시네마)’라는 형식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품 아니던가? 기계가 재현한 움직임이자 현상이었고, 현상에 덧대어진 서사였으며, 언제나 생존을 걱정했던 하나의 기술이자 상품으로서의 영화. 역사란 바로 그‘시네마’의 역사, 인간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영화’의 삶을 다루어야 한다. 영화들을 생산하는 양식, 19세기 이후에 인간에게 나타난 표현 양식으로써의 '시네마(영화)'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어떤 영화들이 나왔으며 또한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사고가 왜 출현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가 그 시대에 지니는 의미, 단지 영화적 의미만이 아니라 일반 역사적 관점에서의 사회적 의미를 다루면서 ‘어떤 영화들’을 보게 하는 게 아니라 ‘영화’라는 표현 양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사에서 언제나 미학 뒤에 감춰져 있던 과학과 철학, 돈과 산업, 시장과 노동자를 영화의 역사에 당당히 불러낸다.
발명되어 예술을 쟁취한 기술, 영화
영화의 역사는 실제로도 미학을 앞세울 만큼 고상하지 않다. 초기의 영화란 한낱 단순한 기계 생산물로서 예술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굳이 용도를 찾는다면 한량과 지친 서민들을 위로하는 심심풀이 오락물에 가까웠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돈을 따라 움직여 온 ‘상품’이었다. 영화에게 있어 예술은, 산업화 시기 유럽과 개척기의 신대륙,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필사의 노력으로 세상을 장악하며 쟁취한 하나의 결과물이었지 근원이나 본질이 될 순 없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기존의 영화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역사를 서술한다.
예술이었다면 소멸이나 도태를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영화는 기술이었기에 자본 시장에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돈은 신대륙 개척과 1차 세계대전을 따라 흘렀고, 영화의 운명에 많은 것을 결정했다. 영화산업의 시스템, 영화 지형과 제작 환경을 바꿨고, 상영과 관람의 방식을 바꿨으며, 수많은 제작자와 제작사를 배출해 냈다. 영화가 상품이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일종의 예술인으로 여기는 감독과 배우도 당시에는 단순한 노동자였다. 이들은 전쟁과 자본이 만든 생태계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연출과 편집, 스타일과 장르를 시도했다. 이로써 대륙 간 영화의 성질이 구분되었고, 같은 대륙 내에서도 곳곳에서 저마다 다른 시기, 다양한 영화들이 탄생해 사조를 이뤘다. 이렇듯 영화가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고 창작물로 변모해 가는 동안, 영화산업의 노동자들도 자연스레 오늘날 우러러보는 창작가와 연기자로 자리 잡는다.
기술과 철학, 자본과 미학의 관점에서 다시 쓴 세계영화사
영화사가 다시 쓰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미학, 작품으로서의 영화는, 적어도 이 영화사에서는 첫 페이지가 될 수 없다. 이제 영화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왜 ‘영화’를 언제나 필름들로 이해해야만 하나? 그것은 오히려 ‘영화’를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 아닐까? 저자는 또, ‘예술 그림’, ‘예술 글’, ‘예술 음악’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호칭이 영화에서는 유독 ‘예술영화’라는 자연스러운 합성어로 대중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영화와 예술을 동일선상에 놓는 데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림이나 글, 음악이 기계로 구현될지언정 기계였던 적은 없는 데 반해, 영화는 탄생의 순간부터 이 순간까지 기술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술일 것이다. 기계가 역사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에디슨과 뤼미에르의 기계가 달랐고, 유성영화가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흑백영화가 색을 입었다. 그래픽이 영화를 만드는 오늘처럼, 기술을 빼놓고 영화를 말할 수는 없다. 엄밀한 시각에서 1897년 발명된 기계로부터 1927년 첫 유성영화의 탄생까지, 영화사의 초기를 세계사의 흐름에 맞춰 기술과 철학, 자본과 미학의 관점에서 다시 써냈다.
역사는 결과를 알고 보는 이야기라고들 한다. 이러한 초기 영화의 역사를 돌아볼 때, 오늘날 영화와 영화산업, 영화인들이 예술의 범주에서 분류되고 현대인의 교양으로 공고히 자리 잡아 문화를 이끌고 있다는 점은 어떻든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영화는 지금도 예술과 비예술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일종의 새로운 예술이 되었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은 후 ‘영화’를 향한 왠지 모를 인간적인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건 아마도 지금껏 영화가 살아낸 불굴의 세월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삶에 귀 기울이다
영화를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영화에 대해 제대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영화의 개념을 정리한 적도 없으며,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지금까지 영화의 제목만 연대별로 나열한 책만 읽어 왔다면 이제 ‘영화로 만든 이야기’가 아닌, ‘영화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다.
십여 년 이상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연구한 김성태 박사가 여기 이 〈영화의 역사〉에 그동안 연구하며 수집했던 자신의 방대한 자료와 지식을 풀어놓는다. 이 책을 통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친근한 어투로 조곤조곤 부추긴다. 덕분에 이 책의 문장은 저자의 육성을 그대로 품게 되었다. 글에 녹아있는 특유의 화법과 목소리는 그의 제자였다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평생을 배우고 가르쳐 온 긴긴 시간만큼이나 영화를 대하는 저자 고유의 감성과 남다른 애정을 책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영화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자는 또 다른 시대의, 또 다른 영화의 생, 영화의 역사 두 번째 발자국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