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의 몸, 삶의 방식,
그 사람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철학자들이 즐겨 먹던 음식을 통해 그 철학자들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뱃속〉은 철학자들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식생활을 추적한다. 디오게네스가 산낙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단호하게 문명에 적대적이었을까? 우유와 치즈로 채워진 루소의 식단과 검소함의 철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디오게네스, 루소, 칸트, 푸리에, 니체, 마리네티, 사르트르, 이 쟁쟁한 철학자들의 사유의 근원이 바로 그들의 ‘입’과 ‘위장’이라는 도전적인 논증이 저자의 박식함과 도발적인 유머를 곁들여 펼쳐진다.
철학자의 식생활로 본 서구 철학의 역사
프랑스 현대 철학의 가장 뛰어난 저작 중의 하나이자 삶의 기예, 사유의 방식으로서의 음식에 관한 유쾌한 논평인 〈철학자의 뱃속은〉은 디오게네스, 루소, 칸트, 푸리에, 니체, 마리네티, 사르트르 등 서구 철학의 주요한 철학자들의 식생활과 그들이 말하고 쓰는 것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식생활이란 인간의 품행을 사유할 수 있는 근본적인 범주로써, 무엇을 먹을지 고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실존의 선택이 될 것이다. 철학자들의 식생활을 나침반 삼아 서구철학의 역사로 들어가 본다.
철학자의 식생활을 탐구한다는 것은 어떤 철학자의 숨겨진 일상사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소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한 철학자의 사유 체계와 그의 실제 육체 활동 사이의 조화와 모순을 살펴보는 것은 객관적이고 실제적으로 한 사람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난해하고 낯선 용어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미세한 차이를 그려내는 대신 가장 단순한 일상의 영역에서 가장 일상적인 행위들로 채워진 철학자의 뱃속을 탐구하는 것은 실제 삶 속에서의 철학의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철학자의 뱃속〉은 온갖 음식/요리 프로그램들이 각종 미디어를 장악하고 삶의 질을 부추기지만 결국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잡식성인가를 전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따라 기획되었다. 이 책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어 왔고, 그것이 우리 정신과 삶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반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철학자가 먹는 것과 말하는 것, 그 사이.
생식주의자 디오게네스, 그는 모두가 불을 사용해 음식을 익혀 먹을 때 불의 사용을 거부한 채 한 모금의 피와 한 줌의 날고기를 먹는다. 급기야 가장 불경스러운 위반, 인육을 먹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던 그는 불로 상징되는 문명과 인간 사회의 인위적 질서에 철저한 저항을 실천하고 있다. 자연에 대해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인간의 오만, 문명이라는 위선에 대해 역사상 가장 지독하게 적대적이었던 사람의 식생활과 당대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살펴보는 과정은 후대의 독자들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토록 한다.
먹는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루소는 평생 우유와 치즈로 삶을 채웠다. 초식동물과 비유되는 루소, 음식으로 인간 진화의 장대한 역사를 설파하며 잉여 생산물과 사적 소유, 욕망과 계급의 탄생까지 간파하는 그는 결국 현재의 미식이야말로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퇴폐와 타락의 증거로 이해한다. 인간의 태생적인 선함을 논하며 인간과 초식동물의 해부학적 유사성, 그리고 잉태와 수유의 유사한 습성들을 제시하는 과학자이자, 자연 그대로의 인간성을 찬양하며 미식과 육식을 거부하고 상업, 풍습, 사치, 지적 활동, 철학 등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비판했던 반계몽주의자라는 그의 면모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성격, 즉 근대성의 풍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엄격하고 매사에 정확한 경건주의자이자 난해하고 까다로운 철학을 제시한 칸트는 애주가로서 30 년동안 꾸준히 술을 마셨다. 순수 이성이 따르라 요구하는 정언명령의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늘 취해있었던 칸트. 그러나 역시 칸트답게 술에 취한 자신을 관찰하며 통찰력을 얻어 만취상태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는 모습은 치열하고 애틋하다.
음식이 사회 변혁의 무기가 될 수 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푸리에와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리네티는 그렇다, 라고 말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모색했던 영역이 바로 음식이었다. 식생활이 세계를 바꿀 것이다. 푸리에가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조화로운 체계를 식생활의 관점으로, 일상의 사소한 부분도 간과하지 않고 세세하게 그려내는 모습은 낯설지만 통쾌하고 원대하다. 그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부류는 ‘미식철학자’다. 그 사회의 생산과 잉여, 영양, 조리법, 교육 등을 담당하는 이들은 미식을 통한 개혁의 중추적 원리를 제공한다. 상상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푸리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음식 전쟁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다.
이탈리아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파스타를 추방해야 한다고 믿었던 미래주의자 마리네티는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사회혁명, 인간을 소외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그 동일한 목표를 음식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국가가 관리하게 되면 이제 사람들은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정치적이면서 미학적인 방식은 음식을 통해 구현된다. 마리네티가 그려내는 미래주의적 세계의 음식들은 온갖 기괴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재료와 맛, 그리고 식사 공간을 배치하는 모습은 실험 예술의 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음식을 예술로 대하라. 니체의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관념과 객관성, 순수지성에서 소외당한 식생활에 정당한 지위가 부여된다. 인류의 구원이 기독교 혹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있다는 주장은 니체 철학의 핵심으로 다가서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니체의 이런 관점은 식생활을 삶의 기술이자 실제적인 효력을 지닌 실존철학으로 만든다. 음식과 식생활을 즐거운 지식으로 만든 니체와 더불어 형이상학과 기독교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옹호되어 온 금욕과 신성에 대한 찬사도 종언을 고한다.
성기와 입을 등가로 이해했던 철학자 사르트르는 특히 갑각류라면 질색을 했다. 식생활과 음식은 이제 상징과 심리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갑각류, 굴, 조개를 유난히 불쾌하게 여긴 그는 거기에서 ‘적출’의 개념을 떠올리고 파내야하는 광물의 느낌을 갖기에 이른다. 음식에 대한 기호뿐만 아니라 위생관념 조차 아예 없었던 사르트르는 신체의 요구에 일일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에 늘 혐오와 경멸을 느꼈다. 저자는 이 철학자를 이데아와 정신은 우월하게 여기지만 자기에 대한 경멸과 몸에 대한 부정으로 평생 악몽 속에 살아간 불행한 남자로 묘사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주요하게 다루어진 일곱 명의 철학자들 외에도 수많은 철학자가 이 책에 등장한다. 이데아와 기독교 세계에서 금욕과 절제에 의해 부당하게 억압받고 왜곡되어 온 식생활에 자유와 기쁨, 행복을 부여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여기, 지금 현재의 자신에게 집중할 것과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우리 몸이 스스로의 운명을 갖도록 허할 것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