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자크 베르디에는 친구 벵상의 뒤를 따라 강둑의 난간 위를 걷는다. 저무는 햇살에, 베르디에의 그림자가 불시에 친구 벵상을 덮친다. 놀란 벵상은 뒤돌아보려다 발을 헛딛고 난간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의식을 되찾은 벵상은 베르디에가 자신을 떼밀었다고 주장한다. 그 순간부터 베르디에는 친구를 아무 이유 없이 난간 아래로 떼민 아이가 된다. 벵상은 며칠 후 사고의 후유증으로 결국 죽는다. 베르디에는 자신의 그림자에 책임을 져야 할까? 우리는 그림자의 사소한 위반에 대한 책임마저 져야 하는 것일까? 이렇듯 베르디에의 삶은 기이한 사고들로 채워진다.
어린 베르디에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라 날카로운 끌로 자기 손톱 밑을 찌른 이웃집 보석 세공사, 베르디에가 건넨 염료를 먹고 죽은 또 다른 친구, 베르디에의 손을 잡다가 벌겋게 달궈진 난로에 곤두박질친 나이 어린 미모의 화실 모델, 급기야 청년 베르디에의 영혼을 지배한 아름다운 여인까지, 베르디에의 불운한 그림자가 기이한 사고들을 뒤덮는다. 그는 자신이 존재만으로도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유해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갈등과 방황 끝에 죽음의 고리를 끊어내려 한다. 무해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삶을 끝내는 것이다.
발로통이 그려내는 세계 속 인물들은 언제나 그림자의 음모 속에 놀아난다. 그림자가 비밀스레 속삭이고, 우리를 얽맨다. 의지와 다짐, 생각과 계획은 그림자의 속삭임 앞에 속수무책이다. 침묵해야 할 때 말하게 하고, 말해야 할 때 침묵을 강요한다. 사랑이 폭력이 되고 폭력은 체념을 낳고 체념은 다시 갈망을 불러일으켜 눈먼 사랑이 되는 종잡을 수 없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베르디에는 길을 잃는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결국 타인을 속이기도 하고 진실이 모두 진실이 될 수는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베르디에와 우리를 절망과 슬픔, 그리고 분노로 향하게 한다. 우리는 모순적이고 안달하고, 쉽게 상처받고 어렵게 화해하며, 금방 잊거나 아주 오래 간직한다.
우리의 의지만큼 우리의 불의가 우리 삶을 주관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삶을 지속하는 것이 끊임없이 타인을 침해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면 우리는 그런 삶을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건들에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절망과 슬픔으로 이끈다. 어떻게 우리는 자신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없듯,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극복한다는 환상만을 갖는 셈이다. 환상을 유지할 때 우리는 낙관하고, 환상이 깨질 때 슬픔을 느낀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삶에서 낙관도 비관도 없이 매 순간 솔직함과 진실을 찾는 수밖에 없다. 현재에 우리 자신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삶이고, 그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면, 그 슬픔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 말고는 슬픔의 도리란 달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