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0개의 절망과 122,713개의 아픔
세상이 주목하지 않은 사람들의 몸짓과 목소리로
지금 여기, 우리 곁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을 그리다
★2022 레드어워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수상
★2023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 선정
“연극 속 17인의 증언이 끝나갈 즈음이면 어느새 우리의 발목은 흥건한 서글픔에 잠기게 된다. 〈산재일기〉는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노동을 하는 ‘존엄한 생명’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일터는 안전해야 마땅하다는 외침이다. 이 책으로 그 외침이 1데시벨 더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 _제페토, 《그 쇳물 쓰지 마라》 저자
“희곡이 소설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우리 사회에서 선한 의지로 자신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공을 들여 작품을 완성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산재일기〉는 그 자체로 노동과 예술의 미시사적 성과다.” _하종강,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독일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말이다. 한 해에 일터에서 다치는 노동자가 10만 명이 넘고 그중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2000여 명에 달하는 이곳 한국 사회에서 ‘산업재해’는 노동자 개개인에게 닥친 ‘비극’이 아니라 단지 숫자로만 존재하는 ‘통계’다. 노동자를 사고와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환경으로 내몰고도 산업재해를 그저 개인의 운 나쁜 일쯤으로 여길수록, 거듭되는 재해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이 반복될수록 수많은 상처와 안타까운 죽음들은 하루하루 무심히 쌓여가는 숫자 뒤에 가려진다.
극작가 겸 연출가 이철의 희곡 〈산재일기〉는 그처럼 하루하루 무심히 쌓여간 숫자 뒤에 가려진 이들의 절망과 아픔을 연극 무대 위로 불러온다. 2022년 고 노회찬 의원 4주기 추모 연극으로 처음 무대에 오른 〈산재일기〉는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입소문을 타고 2023년 봄 대학로에서 다시 공연된 작품이다. 이 책에는 〈산재일기〉 원작 희곡에 더해 작품 기획과 구상, 무대 연출을 위한 고민이 녹아 있는 ‘작가 노트’, 작품 속에 인터뷰이로도 등장하는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전수경의 에세이, 연극평론가 김소연의 해설이 함께 수록되었다.
〈산재일기〉는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 이들과 오랜 세월 동안 연대해온 시민단체 활동가, 하청노동조합 간부와 그의 아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힘을 보탠 변호사, 1988년 원진레이온 사태의 피해자를 치료했던 의사, 유해 환경에서 일한 엄마의 배 속에 있다가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사고로 죽은 청년 노동자의 친구들 등 산업재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 17명의 목소리를 두 명의 배우가 대신 전달하는 실험적인 형식의 희곡이다. 그 생생한 목소리들이 쌓여갈수록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산업재해 통계 뒤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절망과 아픔, 남겨진 이들에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삶과 투쟁이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인터뷰이의 말뿐 아니라 재판이나 청문회 속기록 등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편집하여 재구성하는 형식의 연극을 ‘다큐멘터리 연극’ 또는 ‘버바텀 연극’이라고 부른다. 버바텀(verbatim)은 ‘말 그대로’, ‘글자 그대로’를 뜻하는 영어 단어다.
17명의 인물, 20여 차례의 만남,
50여 시간 분량의 목소리를 쌓아 올리다
〈산재일기〉의 근간은 ‘17명의 인물, 20여 차례의 만남, 50여 시간 분량의 목소리’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의 말이 쌓일수록 산업재해는 사회적 현상(통계)이라는 외피를 벗고 사람 한 명 한 명이 겪어낸 ‘사건’으로서 드러난다. 저마다 제 삶을 소중히 여기는 17명의 인물이 겪어낸 ‘이야기’로 말이다. 이 연극은 산업재해가 누군가의 몸으로 겪어낸 사건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사건임을 증언한다.”(‘작가 노트’ 중)
“원래 그거 하나 뽑는 데 한 30분에서 1시간 걸리는 걸 저는 10분 만에 뽑아내거든요. 근데 이게 기니까 움직여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손으로 받치게 됐어요. 근데 이게 또 날카로우니까, 쇠로 이렇게 깎으면 되게 날카롭잖아요. 여기에 장갑이 빨려들어 가면서 (한쪽 손을 들어 보이며) 이게 들어간 거예요. 근데 그걸 누가 껐는지 아세요? 기계를? 제가 껐어요. 발로. (손목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여기에서 똑 떨어져서 (가상의 밀링기를 가리키며) 여기서 돌고 있더라고. 이걸 보면서 아이고, 그러려니 하고 말았어요.” (박용식/구로동 산재자활공동체)
“산재는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들, 주류에서 벗어난 주변부 노동자들, 여기서 주로 발생하는 문제예요. 산재는 불평등 문제예요. 목소리를 내려면 제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건 주류 노동자만 할 수 있어요. 노동조합이 있거나 직장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1년에 산재사고를 당한 노동자 수가 노동부 통계로는 10만 명이라고 나와요. 그건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어서 신청하고 인정받은 사람만 10만 명이라는 거죠. 실제로는 100만에서 150만일 거라고 얘기해요. 100만에서 150만.” (전수경/노동건강연대 활동가)
“그렇더라고. 첫째로는 하청 자체가 문제지만 그 하청이라는 게 없어지지 않으면 이 죽음이 안 없어지는 거지, 사실은. 똑같이 간다고. 고용 구조와 산재가. 정범식 씨라고 14년도에. 그때 한참 죽을 때예요. 한 달 동안에만 하청 노동자가 다섯 명이 죽었죠? 그날 나도 사망 소식을 들었거든. 점심 때. 11시 30분경에 안에서 사망하셨는데 뭐라고 들리느냐 하면, 자살했다라고. 현장에선 이미 이야기가 돌았고. 그러니까 사측에서 그렇게 뿌리는 거죠. 유족들하고 이야기를 했죠. 이거 아니다, 자살하신 거 아니다, 명백하게 일하다가 돌아가신 거 맞다. 우리가 상황을 알잖아요.” (하창민/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울산지부장)
“근데 그때 제가 임신을 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때 거기서 일했던 사람들 중에 저만큼 그 안에서만 일했던 사람이 있나 싶은 거예요. 저도 라인 밖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계속 얘기는 했죠. 만약 그때 제가 특수건강검진을 했거나 뭔가를 했으면 내 몸에서도 그 언니처럼 뭐가 나오지 않았을까. 특수건강검진이란 걸 알았나요. 회사에서도 그냥 일반적인 거, 그냥 피 검사하고 엑스레이 찍는 거나 해줬지.” (황정희/삼성전자 반도체 생산직 부문 근무 후 퇴직)
“원진레이온의 이황화탄소라고 하는 이 가스는 여러 가지 장해를 일으키지만 뇌신경에 침범해서 뇌의 아주 작은 혈관들을 다 터트려요. 유해물질은 약한 곳으로 번져 나갑니다. 원진에 들어간 기계가 일본에서 온 거였어요. 63년도에 들어왔는데요. 차관 형식으로요. 그 시기에 원진 같은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몇백 명 발생했던 거예요. 우리나라는 그걸 중국에 팔았습니다. 중국도 사고를 겪었죠. 이후에 그게 또 북한에 들어갔다는 설이 있습니다.” (임상혁/녹색병원 원장)
이처럼 작품은 실제 인물들의 목소리를 재현함으로써 ‘산업재해’를 생생하게 마주하게 하는 한편,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요구한다. 이는 〈산재일기〉가 희곡이라는 형식을 넘어 르포 문학의 영역으로까지 지평을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근거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의 삶, 우리의 노동은
어떻게 재해와 연결되어 있는가
2022년 SPC 제빵공장, 2021년 평택항,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2016년 구의역, 2005년 삼성반도체, 1988년 원진레이온... 충격적이고 참혹한 사건들이 발생할 때 우리는 ‘산업재해’라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1988년 이전에도 산재는 계속 있었고, 사회적 관심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에도 노동자의 죽음은 계속 있었다. 산업재해의 참혹함은 어떤 사건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 넓게 산개해 반복되고 있음에도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연 당시 〈산재일기〉의 영문 제목이 “당신 곁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The Report about Death by Your Side)”로 표기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연극평론가 김소연은 해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다양한 인터뷰이의 말들은 〈산재일기〉라는 제목 그리고 ‘버바텀 연극’이라는 형식에서 미루어 짐작하게 되는 것, 그러니까 사건의 은폐된 진실을 밝힌다거나 사건에 얽혀 있는 사회적 구조를 파헤친다거나 현장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연극은 다양한 인물들을 펼쳐 세움으로써 사건의 참혹함에만 집중되어 있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우리 삶과 우리의 노동이 어떻게 재해와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향하게 한다.” 〈산재일기〉가 그 수많은 절망과 아픔 앞에서 우리를 “더 이상 방관자일 수 없게” 만드는 까닭이다.
책의 서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인터뷰라는 형식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매번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깊게 고민할 힘까지 얻기도 했다. 내가 경험한 이런 시간을 연극적으로 재현하는 것. 이것이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연출 방향이었다.” 〈산재일기〉는 무미건조한 통계 수치 뒤에 가려져 있던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이 우리의 노동, 우리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강력한 진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