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전면 개정판!
“자본주의에 맞설 지혜와 용기를 주는 책”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
왜 우리는 늘 상처받고 고통받으며 살아갈까?
상상해보라,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를
5명의 탁월한 인문지성이 안내하는 자본주의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는 법
* 짐멜: 대도시와 돈에 몰려드는 이 시대 욕망의 맨얼굴
* 벤야민: 유행, 매춘, 도박… 거대한 욕망의 집어등
* 부르디외: 가난한 이웃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
* 보드리야르: 자본주의의 목적은 소비! 소비사회에 대한 냉철한 진단
* 페라리스: 웹자본주의, 자기긍정이 자기착취가 되는 세계
‘강신주 현상’을 불러일으킨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 전면 개정판
“‘사용’보다 ‘기호가치’로서의 자본주의 소비 성찰”(〈경향신문〉)
“자본주의의 덫에 걸린 욕망의 군상들”(〈동아일보〉)
“돈에 예속되는 자유 그 안에서 병들어가는 현대인”(〈서울신문〉)
“자본주의적 삶의 허실에 대한 인문학적 진단과 처방”(〈한겨레〉)
“자본주의의 비뚤어진 욕망을 직시하자고 주문하는 책”(〈연합뉴스〉)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와 인간의 욕망을 다룬 인문 교양서”(〈조선일보〉)
“‘소비의 자유’... 알고 보면 ‘돈에 대한 복종’”(〈오마이뉴스〉)
“인문학적 관점으로 자본주의의 속살 들여다기”(〈부산일보〉)
- 2009년 초판 언론사 평
2009년 출간하자마자 인문 교양서로는 드물게 화제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상처받지 않을 권리》 전면 개정판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 다시 쓰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삶의 자유를 빼앗고 그 대가로 소비의 자유라는 치명적인 상처만을 안겨주었다”는 내용을 담은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당시 철학자 강신주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출발점 같은 책이었다. 이 책 이후 《철학 VS 철학》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이 필요한 시간》 등을 연달아 내면서 출판계에는 이른바 ‘강신주 현상’이 거세게 불었다. 강신주는 장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철학 전공자이지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종횡무진 아우르는 보기 드문 철학자, 인문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까지도 그는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응시하는 인문학, 대중의 상처를 치유하는 인문학 책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이번 개정판 《상처받지 않을 권리 다시 쓰기》는 초판의 논의를 이어가면서 내용과 구성을 대폭 수정했다. 초판에 등장했던 이상, 보들레르, 투르니에, 유하 등 문학자들의 논의는 삭제하고, 짐멜, 벤야민, 부르디외, 보드리야르를 다루었던 기존 네 개의 부를 새롭고 풍성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웹자본주의를 숙고했던 페라리스 부분을 새로 추가해 전체 5부로 구성했다. 이탈리아 철학자 마우리치오 페라리스는 국내에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1세기 현재 철학사적으로 신실재론(New Realism)을 이끌고 있는 주역 중 한 명이다. 페라리스는 “사변에서 만들어진, 자기 머리에서만 편안하게 만들어진 혁명들”을 거부하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수준에서 데이터 사회를 냉철하게 파헤친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내면을 새롭게 재편한 새로운 형식의 자본주의, 스마트폰과 자동화, 웹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체제다. 페라리스는 2008년 이후 본격화된 새로운 형식의 자본을 다큐미디어혁명이라고 규정하며, 이를 18세기 산업혁명, 1950년대 미디어혁명에 이은 세 번째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웹에 기록 활동을 통해 동원되며, 끊임없이 다큐미디어자본에 종속된다고 페라리스는 진단한다. 이렇게 개정판에 페라리스를 추가함으로써 초판이 나올 당시에는 예측하지 못했던 AI, 가상현실, 집단지성, 웹, 빅데이터 등으로 상징되는 웹자본주의를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웹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고안한 욕망의 집어등을 스마트폰 한곳에 모아두었다면, 이제 짐멜도, 벤야민도, 부르디외도 그리고 보드리야르도 스마트폰과 웹에서 자신의 통찰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이 탁월한 지성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공간일 겁니다. 그래서 웹의 세계에 익숙한 든든한 안내자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마우리치오 페라리스입니다.”(6쪽, 〈개정판 머리말〉에서)
‘소비의 자유’라는 치명적인 상처
자본주의에서 길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법
“철학적인 사람은 평범하고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할 수 있습니다.”(20쪽)
자본주의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인간에게 자유와 기쁨을 안겨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 강신주는 자본주의에서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소비할 수 있는 자유, 소비할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해 다시 노동을 팔아야 하는 자유, 즉 돈에 예속되고 돈에 복종해야만 하는 자유일 뿐이다. 저자가 보기에 현대인은 이렇게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삶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고 있다. 돈 앞에서 점점 더 작아지고, 점점 더 보잘것없어지고, 점점 더 위축되고 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됐고, 더 많이 벌지 못해서, 더 많이 소비하지 못해서, 남과 비교당해서 계속 상처받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있다.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여 있고 그로부터 상처받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저자는 끝없이 소비의 욕망을 부추기는 이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보자고 말한다. 그래야만 자본주의가 만든 욕망의 집어등을 직시할 수 있고, 우리를 착취하는 돈, 즉 자본주의와 맞설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책에는 자본주의를 입체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5명의 인문지성이 등장한다. 바로 게오르그 짐멜(돈과 도시), 발터 벤야민(유행, 도박, 매춘), 피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와 아비투스), 장 보드리야르(소비사회), 그리고 마우리치오 페라리스(다큐멘탈리티와 웹자본주의)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삶의 내적 논리를 이론적으로 포착하려고 했던 철학자들이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길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방법을 모색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안내를 통해 책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우리 삶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파헤치고,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로 인해 상처받고 있는지를 아프게 직시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다섯 인문지성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만으로도 우리의 자본주의적 삶을 입체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들 다섯 지성의 통찰로 우리의 상처받은 주인공, 지금 어디선가 묘한 결여감을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으로 달래고 있을 그의 자본주의적 삶과 그 내면의 비밀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28쪽)
짐멜, 화폐‧도시와 함께 인간의 욕망도 피어났다
1부 ‘짐멜’ 편에서는 대도시와 돈에 몰려드는 이 시대 욕망의 맨얼굴을 파헤친다. 마르크스 이후 가장 철저하게 돈의 논리를 성찰했던 게오르그 짐멜은 화폐경제로 지탱되는 자본주의가 일종의 세속적 종교로도 기능한다고 말한다. 즉 기독교의 신이 가진 초월성과 포괄성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돈이라는 것이다. 신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면 신도에게 평화와 안식이 찾아오듯, 돈을 수중에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현대인들의 마음에도 여유와 안정이 찾아드는 이치와 같다. 짐멜은 이러한 돈이 어떻게 작동하고 화폐경제가 구체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냉철하게 진단한다.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인간과 사물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돈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짐멜의 진단은 사랑도, 우정도, 신뢰도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짐멜은 화폐경제와 더불어 산업자본주의의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다. 짐멜은 대도시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어떻게 ‘자유’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분석한 뒤 여기에서 개인주의가 출현했다고 말한다. 이 개인주의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의 소비사회가 결합해 나타난 것이다. 겉으로는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표현하는 자유가 실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개인들이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돈이 없다면 개인은 그 어느 자유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다.
벤야민, 유행, 도박, 매춘… 욕망의 거대한 집어등
2부 ‘벤야민’ 편에서는 유행, 매춘, 도박과 같은 자본주의적 삶의 편린들을 파헤친다. 벤야민은 ‘19세기 세계의 수도 파리’를 연구하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것이 바로 책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담겨 있다.
벤야민은 파리의 아케이드를 연구하면서 유행, 도박, 매춘을 통해 우리 욕망을 왜곡시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발견한다. 우선 아케이드와 백화점은 인간에게 새로운 상품을 욕망하도록 길들이고자 고안된 장치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아케이드를 통해서 백화점이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행에 대한 욕망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는지 보여준다. 벤야민은 상품을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혹은 상품을 자신의 체면이나 허영을 충족시키는 기호로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욕망을 읽어낸다. 산업자본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끊임없이 유행을 창출해낸다는 게 벤야민의 분석이다.
벤야민이 숙고한 것은 자본주의의 합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무지 혹은 종교성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의 생명력은 오히려 종교성 그 자체에 있다고 벤야민은 말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돈이라는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과 그의 은총을 기다리는 소망의 심리가 자본주의를 지탱하게 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도박과 매춘이야말로 종교로서 자본주의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라고 언급한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와 달리 자본주의 자체가 현실이면서도 공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벤야민의 입장이 옳다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과가 도출됩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종교로 작동하므로 만일 자본주의의 종교성이 사라진다면, 자본주의도 근본적으로 폐기된다고 말입니다.”(159쪽)
부르디외, 왜 실업자나 노숙자는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가?
3부 ‘부르디외’ 편에서는 아비투스, 구별짓기 등 자본주의에 의해 각인된 우리의 내면세계를 살핀다. 우선 부르디외는 가난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를 아비투스 개념으로 풀어낸다. 부르디외는 두 종류의 아비투스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미래가 있는 사람’의 아비투스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가 없는 사람’의 아비투스이다. 부르디외는 미래가 없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상황의 변화,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혁명적 성향을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즉 실업자나 노숙자들은 최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여력마저도 없기에, 전체 체계를 자신의 시야를 통해 합리적으로 성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억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웃들이 최소한 극단적인 생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그들에게 미래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능성의 장”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부르디외는 진단한다.
또한 부르디외는 아비투스 개념으로 분별력이 있다고 자처하는 상류계급의 내면세계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상류계급과 하류계급이 각각 다르다. 부르디외는 이런 미적 성향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작용하는 아비투스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류계급과 하류계급 사이의 이런 차이는 선천적인 차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상류계급 사람들은 자신의 미적 능력이 자신들이 가진 돈과 생활의 여유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상류계급의 순수예술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 자신을 하류계급과 구별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렇다고 하류계급의 대중예술과 미적 취향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프롤레타리아의 아비투스는 긍정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피지배자의 아비투스, 혹은 복종의 아비투스니까요. 노예의 아비투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노예는 주인을 제거해도 다른 근사한 주인을 찾아 복종하려 할 테니 말입니다. 결국 자유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아비투스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해방의 아비투스 혹은 자유의 아비투스일 겁니다. 그래야 복종의 아비투스가 지배의 아비투스로 덤블링하는 비극도 막을 수 있습니다.”(260쪽)
보드리야르, 치명적인 소비사회의 유혹
4부 ‘보드리야르’ 편에서는 소비사회의 유혹적인 논리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해본다. 68혁명을 자신의 온몸과 마음으로 체험했던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의 원동력을 ‘소비’에서 찾는다. 그는 산업자본주의가 이토록 빠른 속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술 개발에 의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소비사회의 논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산업자본주의는 어떻게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었을까? 보드리야르가 주목한 것은 바로 기호가치이다. 이 기호가치는 타인보다 우월해져서 그들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이 날조한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산업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보드리야르는 그 방법을 “불가능한 교환”에서 찾는다. 그는 교환되지 않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해서 교환 불가능한 것이 우리 주변 곳곳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선물로 대표되는 상징적 교환의 논리이고, 이를 통해 산업자본주의가 던져놓은 욕망의 집어등을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비 영역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 나아가 소비자의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전략이 관철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소비 영역은 산업자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결국 소비 영역은 산업자본의 아킬레스건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자유로운 기회의 장이었던 겁니다. 보드리야르가 소비 영역, 혹은 일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물을 숙고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물이 산업자본이 원하는 소비의 대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향유와 긍정의 대상일 수도 있으니까요.”(314쪽)
페라리스, “우리는 동원된다, 그리고 자본에 종속된다”
5부 ‘페라리스’ 편에서는 자동화와 웹이 지배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체제의 비밀과 자기긍정이 자기착취가 되는 현상을 면밀히 살핀다. 페라리스는 사회를 기록성, 즉 다큐멘탈리티로 이해한다. 그 개념을 통해 우리의 삶과 내면을 새롭게 재편하고 있는 새로운 형식의 자본주의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그는 다큐멘탈리티와 미디어 사이의 만남과 결합을 다큐미디어혁명이라고 부르며, “우리는 아직 이 혁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페라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AI, 가상현실, 집단지성, 웹, 빅데이터 등으로 상징되는 다큐미디어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다큐미디어혁명은 과거의 상업자본, 산업자본, 금융자본도 낡은 것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혁명적이다. 페라리스는 이런 시대를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한다. 마르크스의 자본 운동의 일반 공식, 즉 ‘화폐-상품-화폐′(M-C-M´)’ 공식을 수정한 ‘소비-기록-소비(C-R-C)’ 공식이 바로 그것이다. 공식에 처음 등장하는 C는 단순한 상품 구매와 같은 소비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랩톱으로 수행하는 모든 행동에 뒤따르는 삶과 에너지의 소비를 의미한다. 공식의 두 번째 R는 소비자가 웹에 남긴 기록, 즉 소비에 대한 빅데이터와 정보를 의미한다. 마지막 C는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에 펼쳐진 상품들을 게걸스럽게 소비하는 단계이다.
우리는 수없이 웹에 뭔가를 기록한다. 이 데이터들은 매일 쌓여 빅데이터가 된다. 그 빅데이터는 누가 활용하는가? 누가 가치를 생산해 이익을 보는가? 페라리스의 말대로 “우리는 동원된다”, 그러면서 다큐미디어자본에 종속된다. 페라리스는 우리가 매일 하는 이런 기록 활동을 가치를 만드는 하나의 ‘일’로 바라본다. 그렇지만 다큐미디어자본은 그 대가를 결코 지불하지 않는다. 이것은 임금을 받지 않고 노동하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그래서 페라리스는 다큐미디어 시대를 “자기-가치화가 자기-착취”가 되는 시대로 규정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도 모호해진다. 갈수록 일자리가 사라지며, 저가의 일자리와 고가의 일자리만 남게 된다.
그렇다면 페라리스의 대안은 무엇일까? 문제는 웹에 저장된 데이터들로 발생한 잉여가치를 다큐미디어자본이 독점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데이터를 생산한 개개인 유저들에 대한 착취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 가치들을 사회화하자는 게 페라리스는 주장한다. 또한 ‘데이터조합’과 ‘덕은행’을 만들어 다큐미디어자본과 맞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개개인이 웹에 남긴 데이터는 부를 창출하기 힘드니, 빅데이터는 아닐지라도 소규모나 중규모의 데이터를 집적해 산업 파트너와 거래하고 그 대가를 조합원들에게 분배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페라리스는 외친다. “만국의 소비자여! 단결하라!”고. 소비자가 단결해 데이터를 사회화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생각해보라고 충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