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서평
“에밀리 휴즈는 묵직한 나뭇결, 어두운 돌의 광택 등 이사무 노구치 조각 작품의 표면을 섬세하고 주의 깊게 묘사한 삽화를 통해 시각적으로 우아한 이야기를 완성해 냈다” - Publishers Weekly
“예술가의 복잡한 삶을 섬세하게 기록하려는 야심찬 시도” -Kirkus Reviews
“이사무의 삶과 예술의 복잡성을 자신만의 솜씨로 세심하게 설계하고 정교하게 표현한 수작” - Booklist
세상에 빛을 선물한 예술가, 이사무 노구치!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는 1904년 11월 17일 미국 LA에서 일본인 요네지로 노구치(Yonejiro Noguchi)와 미국인 교사 레오니 길모어(Leonie Gilmour)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 유학생이던 요네지로는 이사무가 태어나기 전에 일본으로 돌아갔고, 혼자 이사무를 낳은 레오니는 2년 뒤 어린 이사무를 데리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요네지로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낯선 땅, 일본에서 이사무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10년 뒤, 레오니는 이사무를 미국의 한 고등학교로 유학 보냈습니다. 이사무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샘 길모어(Sam Gilmour)라는 미국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사무는 콜럼비아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으나, 우연히 접한 조각의 매력에 빠져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사무 누구치는 구겐하임 장학금으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고, 모더니즘 조각의 거장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의 제자가 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는 뉴욕 미술계에서 이사무의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시작됐고, 이사무는 일본인을 향한 미국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스스로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수용소의 일본인들은 오히려 그를 미국의 스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던 이사무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 때만큼은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치유의 경험은 이사무의 예술의 경계를 확장시켰습니다. 이사무는 주로 돌로 조각 작품을 만들었지만, 대형 빌딩과 공공기관의 정원이나 공원을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구나 조명기구 같은 인테리어 제품도 디자인했습니다. 일본의 전통 등에서 영감을 얻어 대나무 살에 뽕나무 종이를 붙여 만든 조명 기구 ‘아카리(Akari)’는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술에 대한 평생 공헌을 인정받은 그는 1982년 에드워드 맥도웰 메달, 1986년 교토 예술상, 1987년 미국 국민 예술훈장, 1988년 일본 '신성한 보물' 훈장 등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