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정의 비대칭 인간은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소설의 역능을 떠올리게 하는 문제작이다. 그것은 바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소설의 윤리적 기능과 연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 창공의 별이 사라진 시대의 서사시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근대의 산물인 소설은 고독한 밀실에 갇힌 개인이 쓰고, 또 다른 밀실에서 그것을 읽는 개인에 의해 유지되는 예술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밀실의 고독을 뛰어넘어 언제든지 광장을 지향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충동은 함께 바라보고 의지하는 ‘창공의 별’을 향한 지향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 지향은 삶의 방향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소설은 광장 지향성과 밀실 지향성의 변증법을 통해 전개되는 예술 장르인 것이다.
「유령 가족」은 끔찍한 가족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로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악인이라기보다는 정신병자에가까운 사람들이다. …… ‘나’는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게 삶의 목표였지만, 그리해서 피나는 노력으로 학력과 커리어를 쌓아나갔지만, 그것들은“내가 갖지 못한 배경에 가려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이 삐까번쩍한 하와이의 유령 가족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령 가족은 현대인의 필수적인 덕목으로까지 그려진다.
「엄마 같은 말」은 피를 나눈 진짜 가족이 얼마나 따뜻하고 끈끈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 결국 옥자 씨는 수진에게, 자식은 자신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가라는, 역시나“엄마 같은 말”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옥자 씨 수혁으로부터 받은 천만 원이 든 봉투까지 수진에게 건넨다. 작품은 집으로 돌아온 옥자 씨가, 자신의 다음 학기 강좌가 폐강됐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도 손주들을 정성껏 돌보는 것으로 끝난다. 「유령 가족」의 정신병자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모습은 「엄마 같은 말」의 옥자 씨가 엄연한 지배인으로 군림하는 진짜 가족의 따뜻함을 더욱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다.
「입금하는 사람」의‘나’는 시간제 알바생으로서 고향을 떠나 서울의 작은 원룸‘해피하우스’에서 살아간다. 생존 자체가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인‘내’가 관심을 가지는 단 한 가지는, 벽의 곰팡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 이 지지리 궁상의 풍경에는 어떠한 전망도 없다. 오히려 정의감에 불타던 청년은 자신이 마주한“벽”에 좌절하여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내’가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이 절망의 자리는 참으로 투명하여 담담하기까지하다. 어쩌면 이은정은 때묻은 희망보다는 투명한 절망으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가만히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침대는 잘못이 없었다」의 주인공 화영은“논두렁에 네 다리가 얽매인 소처럼 손발 아끼지 않고 살아도 겨우 학교를 졸업하고 운 좋으면 겨우 취직할 수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이십대”여성이다. …… 102호 여자는 진짜 성자였던 것일까? 102호 여자와의 만남이 있은 이후, 축복과도 같은 일들이 화영에게 밀려들어 온다. 결별을 선언했던 태호는 화영의 집에 다시 찾아와서 복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졸업할 때까지 누나와 함께 살던 집을 혼자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태호는 화영에게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는 제안까지 한다. 화영은“자신의 인생에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은 없었다”라며, 힘차게 웃으며 작품은 끝난다.
표제작이기도 한「비대칭 인간」은 무척이나 사변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나’는 이십 대 취준생으로서 선글라스를 끼면 자꾸 어긋나고 삐뚤어지는 증상을 겪는다. 이것은 너무나 미세한 증상이어서‘나’만 민감하게 느낀다고도 볼 수 있는 정도이다. …… 수오가‘나’에게 던지는 “너는 그냥 너의 모든 것이야!”라는 말은‘적당한 거리’라는 삶의 지혜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에 대한 긍정과 사소하지만 구체적 실천을 통해 비대칭은 대칭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비로소 개시되는 것이다. 「비대칭 인간」에서 제시된 삶의 방향성은 이은정이 제안하는 한국 소설의 방향성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소란」은 십오 년 전에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린 소란이 파주에 사는 수진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진은 조그만 집에서 대필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소란의 삶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은 불행한 삶이 그대로 압축되어 있다. …… “인생은 너무나 제각각이라서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예상하고 규정하는 것은 무례하거나 바보 같은 일이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는“자신은 거의 모든 삶의 피해자이고 타인은 대체로 삶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 속에서 우린 그토록 이기적인 것이된다”라는 아포리즘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희망의 정언명령’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눈이 와요」는 예외적인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눈 내리는 겨울밤의 포장마차를 무대로 하여 펼쳐지는 한 편의 연극과 같은 작품이다. …… .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아를 응징하는 이 낭만적인 살해의 방식은 그 악마적 인간성마저 순백의 아름다움 속에 파묻어버리는 미학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현실의 미학화는 때로 아름답지만 이토록 치명적이기도 한 것이다.
문학사에서 개인이 문제되는 것은 특정한 역사철학적 상황에서이다. 특정한 이념이나 담론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개인의 존재방식은 문제되지 않는다. 권위적인 대타자의 가장 큰 역할은 총체성의 우주 속에 개별 인간들의 자리를 배치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문제는 그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가는 개별 주체의 신의나 능력에 대한 것이지, 존재방식 그 자체일 수는 없다. 그러나 상징계적 효력이 소멸하고 대타자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삶의 주체로서의 개인이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 다시 개인의 가치지향을 묻는다면, 그것은 개별적 존재자의 삶에 대한 성찰인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의 전망에 대한 탐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은정의 비대칭 인간은 이러한 시대적‧문학사적 흐름 속에서 전망이 아닌 희망의 방식으로 삶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독특한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설 ‘전망이 아닌 희망의 서사(이경재 문학평론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