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
조선독립의 최전선에서 투쟁한 여장군,
김명시의 뜨거웠던 삶을 되살리다
2022년 광복 77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해방 후 행적 및 사망 경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두 번의 포상 신청 탈락 끝에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김명시는 경상남도 마산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로, 소련과 중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조선의용군에서 유일하게 ‘장군’으로 불린 여성 지휘관임에도, 김명시는 오랜 시간 역사에 묻혀 있었다.
국제주의자이자 항일무장투쟁 전사였으며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로서 맹활약한 여성 운동가 김명시. 이 책은 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 김명시의 삶과 행적을 정리한다. 김명시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마산지역의 역사적 배경부터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을 펼치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저자 이춘은 흩어져 있던 김명시에 관한 자료와 기사를 모아 김명시의 생애를 복원했다.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김명시 형제와 동지들의 삶도 엿볼 수 있다. 부록에는 김명시가 생전에 했던 연설과 인터뷰, 연표 등을 실어 독자들로 하여금 김명시의 활동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소련과 중국을 넘나든 항일무장투쟁전사 김명시
김명시는 3.1만세운동의 열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족과 동포에게 총칼을 휘두르는 일본 경찰과 군대, 나라를 빼앗긴 민중을 보며 자란 김명시에게 3.1운동은 학교나 다름없었다. 고려공산청년회 소속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떠난 김명시는 일찍 상해로 파견되어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김명시의 활동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30년 5월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 사건’이다. 기념비적인 만주 항일무장투쟁 선봉대의 유일한 여성이 김명시였다.
김명시는 1932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7년 동안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고, 출소 후에는 일본군과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는 중국 팔로군에 종군했다.
1942년에는 무정과 함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적지에서 첩보활동과 선전공작을 펼치며 김명시는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싸웠다.조선독립동맹 천진 북경 책임자로서 일본군 점령지인 천진, 제남, 북경 등에서 조직을 만들고 투쟁한다는 것은 생명을 내건 모험이었다. 김명시가 얼마나 담대하게 독립운동에 헌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의용군에는 수많은 여성이 참여했지만, 그들 중 ‘장군’으로 불린 여성 지휘관은 김명시가 유일하다.
“농민과 노동자도 인간답게”를 외친 노동운동가
책에서는 김명시의 또 다른 정체성인 노동운동가로서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당시, 기관지를 국내로 반입하라는 임무를 맡은 김명시는 인천 제물포에서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교육했다.
해방 이후에도 김명시는 혁명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한다. 그는 여성운동 최대의 결집체인 조선부녀총동맹 간부로 활동하며 노동자, 농민, 소시민 부녀, 지식인 여성 등 광범한 여성의 참여와 지지 속에 일상활동과 정치 활동을 펼쳤다. 김명시는 농민과 노동자도 인간답게 대접받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연설로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그는 지방 강연을 다니며 각지의 부녀동맹 조직을 지원하고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해방을 외쳤다. 김명시는 부녀총동맹을 대표하여 모든 집회에 불려 다니는 인기 연사였다.
내가 여러 동무들과 더불어 피로 기록된 연안 생활을 회상할 때 일상 골수에 배긴 소원은 어떻게 하면 조국의 농민 근로대중의 심고를 덜게 할 수 있으며 그들과 함께 남과 같은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부녀총동맹 결성대회 김명시 연설 중에서
고향에서조차 잊힐 뻔한 김명시를 역사에 소환하다
치열한 삶을 살았기에 김명시의 죽음은 의혹투성이였다.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194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10월 유치장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려진 전부다.
그런 김명시의 삶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었다. 책에는 김명시의 생애와 함께 마산의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가 김명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이 담겨 있다. 희망연대는 김명시의 독립유공 포상 신청을 진행했고, 두 번의 심사 탈락과 국가보훈처와의 간담회 끝에 2022년 김명시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된다. 김명시는 사망한 지 73년 만에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희망연대는 이뿐만 아니라 연좌제의 두려움에 시달리며 살던 김명시의 친족을 찾아내 김명시 형제들에 관한 기억을 되살렸다. 김명시의 서훈을 이끈 희망연대 김영만 고문이 직접 겪은 한국전쟁, 4.19혁명, 베트남전쟁 이야기를 통해서는 ‘잃어버린 땅은 찾았지만 청산되지 못한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것이 김명시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임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글과 자료로 고스란히 실린 희망연대의 오랜 여정은 독자들이 김명시의 삶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아직도 독립공훈을 인정받지 못한 항일투사들이 많다. 국가와 대중을 위해 헌신했던 항일독립영웅 김명시. 『김명시』를 통해 되살아난 그의 치열한 삶과 투쟁은 잃어버린 독립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의 자랑스러운 한쪽을 복원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