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트스, 이 시대 최고의 바흐 해석자,
안드라스 쉬프가 들려주는 삶의 궤적과 음악의 본질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클래식 애호가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안드라스 쉬프의 책이 국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2017년 독일어로 출간되었던 이 책은 음악 저널리스트 마르틴 마이어와의 대화와 안드라스 쉬프가 그간 여러 지면에 발표한 에세이로 구성되었다. 대화 전반부는 음악 전반에 대한 쉬프의 깊이 있는 생각들로 채워져 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레퍼토리, 더 나은 연주 연습에 대한 견해, 곡에 적절한 악기로 연주하는 것의 중요성, 실내악에 대한 애정, 젊은 음악가를 교육하는 일, 동시대 음악과 청중, 그리고 비평가에 대한 생각 등 쉬프의 음악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그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대화 후반부는 출생부터 현재에 이르는 쉬프 일생에 대한 문답이다. 올해로 70세가 된 그가 찬찬히 그리고 담담하게 회고하는 이야기에서는 헝가리에서 경험한 반유대주의와 공산주의 통치에 대한 경험부터 팔 카도사나 라도스 페렌츠와 같은 마에스트로들과의 음악 훈련, 고향을 떠난 후 망명객 신분으로 새롭게 시작한 서방에서의 고된 연주 생활 등 그동안 우리가 듣지 못했던 쉬프의 내밀한 속내 또한 펼쳐진다. 그가 들려주는 헝가리에서의 경험은 쉽게 접할 수 없던 2차 세계대전 이후 헝가리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를 가늠하게 하며, 위대한 작곡가와 연주가를 배출한 헝가리 음악교육 체계와 문화적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이 책을 통해 시대의 한계와 제약 속에서도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한 피아니스트, 그리고 한 사람의 여정을 찬찬히 따라가 보자.
공산주의 헝가리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기억과
망명 이후 가난한 음악가에서 세계적 거장이 되기까지의 여정
1부 ‘마르틴 마이어와 나눈 대화들’에서는 소련과 동구권이 건재하던 시절 헝가리에서 20대 중후반까지 보낸 쉬프의 이야기를 상세히 들을 수 있다. 그는 이 대화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공산주의 시절의 헝가리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풀어놓는다. 안드라스 쉬프는 195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부인과 의사였던 아버지와 피아노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나치 수용소에서 각자의 배우자와 자녀를 잃고 생환한 유대인이었다. 쉬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헝가리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마치 터전이 없는 것과 같고, 배제당하는 것과 같았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소속감의 문제는 유년 시절 내내 그를 따라다닌 문제였다.
다섯 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안드라스 쉬프는 15세에 헝가리 텔레비전 방송에서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후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팔 카도사, 죄르지 쿠르탁, 페렌츠 라도스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안드라스 쉬프에게는 흔히 거장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신동’의 역사가 없다. 유일하게 우승의 역사를 쓴 소년시절의 경연대회 이후 그는 다른 음악 콩쿠르에서는 우승을 하지 못했다. 청년 시절에는 공산권 국가의 명령대로 쉬프 ‘동지’로서 헝가리 지방을 돌며 연주여행을 다녀야 했다. 수준 낮은 오케스트라와 부러진 피아노 다리를 벽돌로 괴어 놓는 등의 열악한 환경에서 열리는 작은 연주회였다. 헝가리 외에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구권 연주여행을 다니며 한순간 아코디언 명인이 되었던 웃지 못할 일까지도 겪는다.
1979년 영국 순회연주 이후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고 망명객이 된 안드라스 쉬프는 친척들이 사는 영국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간다. 혈혈단신으로 도착한 뉴욕에서 녹록지 않은 제2의 커리어를 시작한 쉬프는 미국 중소 도시의 농구장이나 아이스스케이트 링크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오늘날 쉬프의 모습을 생각할 때 그가 경력 초기를 그러한 결핍과 어려움 속에 보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쉬프와의 대화 속에서 그러한 시대적 여건을 탓하거나 비애감에 빠지는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는 그저 조용히 작은 걸음을 지속하며 꾸준히 자신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안드라스 쉬프를 만든 깊고 단단한 사유의 세계로
2부 ‘에세이들’에 실린 안드라스 쉬프의 글에서는 그의 연주만큼이나 명료하고 단단한, 때로는 위트 있는 사유를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은 비단 음악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극우 정치인 외르크 하이더가 수상으로 있는 한 오스트리아에서는 연주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발언이나 국경에 철조망을 세워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빅토르 오르반 총리에 대한 날선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많은 음악인의 정치적 무관심과 입장 회피를 안타까워한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에서 쉬프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등 그가 존경하는 작곡가의 업적을 기리며, 바흐와 같은 작곡가들의 연주를 둘러싸고 쟁점이 되는 사항들, 예를 들면 바흐의 곡을 바흐 시대의 악기가 아닌 현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 페달 사용의 문제 등에 대해 자신의 분명한 견해를 밝힌다. 애니 피셔, 산도르 베그, 루돌프 제르킨 등 그가 존경하는 선배 명연주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와 그들과의 일화도 만나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작곡가의 친필악보를 직접 보고 연구하는 일이 곡 해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스포츠로 변질되어 버린 음악 콩쿠르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글에서는, 연주란 손놀림, 발놀림의 향연이 아니며 테크닉에 앞서 곡의 정확한 분석이 우선이고, 피아니스트가 아닌 피아노가 노래하게 해야 한다는 음악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바흐 해석의 권위자로 불리는 쉬프가 〈골드베르크 변주곡〉 여행가이드가 되어 친히 안내하는 30개 변주곡에 대한 해석은 쉬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