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밀린 보험료가 23만 원인데 그 돈을 내야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요.”
“아…….”
“23만 원 가지고 다시 오세요.”
고등학교 한 학기 등록금이 10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면 엄마는 며칠 동안 이곳저곳으로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다. 가끔 병원에 가기 위해서 내야 할 그렇게 큰돈은 없었다.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나에게 동사무소 직원은 돈을 가지고 오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동사무소에서 돌아 나오는 골목은 하염없이 길게 느껴졌다. 눈부시게 맑고 화창한 햇살이 얼굴을 가득 채웠지만 갑자기 터진 울음에 눈물을 닦아내느라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걸로는 당장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엄마도 내가 대학에 가길 원했지만 재수를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내 성적으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고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그 무언가가 되어야 했다.
그 짧은 순간 떠오른 게 ‘간호사’였다. 그러면 의료보험이 없어도 웬만한 치료는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난 그때 그렇게 간호사가 되기로 굳게 결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만큼 간절했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22-23쪽)
“야, 뭐해? 니 환자잖아!!”
달려온 선배들은 기관 내 삽관을 준비하고 주치의를 불렀다. 또 다른 선배 하나가 멍하게 서 있는 나를 대신해 환자의 가슴 위로 뛰어올라 심장을 힘껏 누르며 소리쳤다.
“뭐해! 에피네프린 하나, 빨리!!!”
주사기로 약을 재는 내 손이 떨고 있었다. 선배들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환자는 무사히 고비를 넘겼지만 나는 선배에게 심한 질책을 들어야 했다.
“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환자 하마터면 잃을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목숨이 달린 일이야. 알겠어?”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랬다. 그 환자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서투르고 겁에 질린 나 때문에.
한껏 움츠러든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선배의 격앙된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4분이면 죽는 거야, 뇌는. 그러면 살아난다 해도 평생 누워서만 지내야 돼. 환자의 심장이 멎을 때마다 담당 간호사가 얼어붙어서 시간을 지체할수록 환자는 그렇게 되는 거야.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우선은 무조건 달라붙어. 달려들라고. 너와 네 환자 사이가 가까울수록 네 환자는 살아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니까.”
그 후로 나는 심폐소생술이 시작되면 무조건 환자에게 달라붙었다. 당황해서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도 몸으로 먼저 달려들었다. 선배의 말이 옳았다. 멈춘 심장을 누를 때마다 간절히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고 그를 살리기 위해 뭘 해야 할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은 빠르고 자연스럽게 내 몸으로 배어 들어갔다. 정말 가까이 있어야 그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그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그랬다. (36-37쪽)
간호사라는 직업은 제대로 된 돌봄을 받아야만 받은 돌봄을 그대로 환자에게 베풀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 누구의 보호도,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내 환자들에게 무한한 돌봄을 베푼다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밝은 척, 괜찮은 척, 내 환자들에게 미소 짓고 그들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나 자신은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걸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나에게 맡겨진 환자만을 위해 오로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내 생각은 틀렸다. 간호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행위 하나하나가 돈이 되는 의사와 달리 환자의 입원료 안에 모두 속해 있었다. 간호사인 내가 가장 먼저 심정지를 발견하고 환자의 몸 위로 뛰어 올라 빠른 심장 마사지를 시작해 다시 살려내도, 위험에 빠진 환자를 살리려고 처방권을 가진 주치의를 찾아 발을 동동 구르며 의국까지 쫓아가 잠이 덜 깬 의사를 환자 앞에 데려다 앉혀놓아도, 응급 상황을 대비해 환자의 목숨이 달린 모든 물품들과 의료기기들을 아무리 꼼꼼히 체크한다고 해도, 주치의가 환자에게 고위험 시술을 완벽히 할 수 있도록 기구들을 빠짐없이 준비하고 정확히 어시스트를 한다고 해도, 행여 초라해 보일까 사망한 내 환자들의 마지막 면도를 해주고, 마지막 모습에 흠이라도 될까 안절부절못하며 터진 항문에 고개를 들이밀어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대변을 수십 번씩 씻어준다 해도, 내가 한 모든 일은 단지 입원료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채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병원에서 돈이 되지 못하면 간호사가 환자에게 행하는 그 어떤 일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돈이 되지 않는’ 간호사들은 점점 천덕꾸러기가 되어가면서 근무시간을 넘기는 것 정도는 당연히 여기게 됐고, 근무가 끝나면 청소 용역비용을 메울 미화원이 되어야 했다. 내가 돌보는 환자의 침대 밑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 쪼그려 앉아 수세미로 침대를 닦아내던 나를, 그 누가 자신들을 돌보는 간호사로 봐줄까. (58-59쪽)
심폐소생술이 또 시작되었다. 세상이 어떻든 중환자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심정지가 오자마자 바로 환자의 몸 위에 뛰어올랐고 체중을 실어 있는 힘껏 심장을 눌렀다. 주치의가 오면 기관 내 삽관이 바로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재빨리 주사기로 응급 약물을 환자의 몸에 투약했다. 중심정맥관을 챙겨 카트에 옮긴 뒤 혈압을 체크했다. 낮은 혈압을 올려줄 승압제를 준비하고 수액 조절기를 환자 옆에 거는 내 손이 더욱 빨라졌다. 주치의가 중심정맥을 찾는 사이 적혈구 두 팩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도록 팔에서 정맥 하나를 찾아 바늘을 꽂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가로 떨어져 두 눈이 따가웠다.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네가 바로 저승사자와 싸우는 아이로구나.”
내 모습을 한참 동안 옆에서 지켜보던 한 할머니가 두 눈가로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고 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순간, 그동안 희망론자와 회의론자를 오가던 중심 없던 마음이 가슴 아래로 묵직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나는 내 환자들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희망과 회의 사이를 오갈 시간조차 아까웠다. 할머니의 그 말씀은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고 나는 내 환자들을 위해 정말로 ‘저승사자와 싸우는 간호사’가 되어갔다. (89-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