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빛을 보게 된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천황 및 황태자 암살 혐의로 체포된다. 이때 가네코 후미코는 예심 판사에게서 재판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일대기를 쓸 것을 명령받는다. 이에 그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하였으며 오로지 사실에 몰두하여 수기를 작성하였다. 재판이 끝나고 가네코 후미코는 해당 수기를 돌려받아 자신의 동료에게 보내고, 이 원고에 어떠한 미사여구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출간 의사를 전달한다. 그의 생애를 담은 수기는 가네코 후미코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에 나오게 된다.
2012년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를 담은 수기『나는 나』가 한국에서 번역·출간되었지만 판매 실적은 저조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생애를 다룬 의미 있는 책이었으나 그 생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17년, 영화 <박열>이 개봉하며 창고 속에 묻혀 있던 『나는 나』는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영화 <박열>이 주목받기 시작하자 대중들은 조선의 독립운동가 박열을 궁금해했고, 그와 동등한 관계에서 동거서약서를 작성한 가네코 후미코를 궁금해했다. 책은 영화가 그리지 못한 가네코 후미코의 유년·청년기를 담고 있다. 반역죄로 감옥에 갇혀 23년의 짧은 삶을 끝낼 때까지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가 아닌 ‘나’로 살기 위해 용기 내고 실천했던 ‘가네코 후미코’. 이 수기는 국가와 가부장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염원하고 실천했던 그가 남긴 치열한 삶의 기록이다.
나는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영화 <박열>을 통해 재조명된 인물인 만큼, 사람들은 가네코 후미코를 이야기하며 박열의 아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언론에서는 독립운동가였던 박열과 더불어 ‘대한민국건국훈장을 받은 일본인’이라는 이례적인 예로 후미코를 조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아내라는 사실은 그가 지닌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이상에 충실한 여성이었고, 힘든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며 나 자신이라는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기를 염원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가난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무적자’였다. 취학 연령이 되어도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사설 학교에서 공부했으나 그마저도 생활고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후미코의 이모)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어머니는 재혼을 거듭하면서, 후미코는 1912년 충청북도 부강에 살던 고모의 양녀로 조선으로 건너온다. 그러나 그곳에는 양녀가 아니라 식모의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7년 동안 자살까지 결심할 정도로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받은 이후 파양되어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배움의 뜻을 안고 도쿄로 상경하지만, 도쿄에서의 생활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신문팔이, 노점상, 행상, 식모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고학의 길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고된 노동과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임금은 그에게 연필을 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 부르주아, 조선인 유학생, 기독교도 등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나고 배반당하며 후미코는 절망했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그 고난을 딛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계기로 삼으며 투쟁하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모든 환경 속에서 학대받을 만큼 학대받은 나의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격,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벌써 열일곱 살이 되었다. 나는 이미 자립할 수 있는 연령에 달해 있다. 그렇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_<도쿄로>에서
삶을 개척해나갈 독자들에게 건네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선물
새롭게 선보이는 『나는 나』 리커버는 누구보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그의 뜻을 받들어 가네코 후미코의 일러스트를 전면에 드러내었다. 불꽃처럼 짧은 생을 살아간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삶을 직접 훑으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탐색한다.
나는 더 많은 세상의 부모들이 이 수기를 읽어주었으면 한다. 아니, 부모들뿐만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교육가, 정치가, 사회사상가 모두가 읽어주었으면 한다. _<머리말>에서
그는 자신의 생을 기록하고 불살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불운한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생을 꿋꿋이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전해준다. 이 수기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선 한 여인의 투쟁이자,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23년의 생을 살아간 한 인간의 기록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독자들에게 건네는 가네코 후미코의 뜨거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