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묘지, 책 속으로
◆ 미군은 야포와 전폭기를 동원했다. 몇 달 동안 무차별 불의 세례를 내렸지만, 오성산에 주둔한 중공군은 영원히 괴멸되지 않는 병마총 군사들이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진시황의 군사들처럼 오성산 전초인 저격능선에 나타났다. 중공군은 개활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저격능선에서 아식보총A式步銃이라 부른 소련제 장총에 망원경을 달아 사격하였다. 그때마다 미군은 사격장의 표적지처럼 일어섰다가 드러누웠다. 미군은 능선 아래서 보병이 접수하지 못하는 진지전의 참상에 치를 떨었다. (막다른 골목, P-15)
◆ 전방에 가면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전투에 이기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다. 지휘관들의 독려는 대부분 밥에 관한 것이었다. 그 말이 헛됨을 알면서도 밥을 찾아 불평불만 없이 훈련하고 내무반에 적응하는 것이 병사의 길이었다. 쉽사리 이루기 어려운 소망은 언제나 찬란했다. 희고 기름진 쌀밥이나 원 없이 먹어 보았으면!
(밥의 유혹, P-28)
◆ 그러나 막상 용산으로 왔을 때 그가 보고 싶어 했던 탱크는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에게 지급된 건 둥글고 긴 원통 모양의 쇠붙이였다. 거기에 역시 쇠붙이인 포판과 삼각대를 결합한 무기가 박격포였다. 60밀리 박격포를 어깨에 짊어지고 종일 연병장을 도는 고된 훈련을 받고서야 김유감은 이승만 정부의 군대에는 탱크가 한 대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행가와 정치, P-41)
◆ 대검이 등뼈에 부딪히는 느낌이 이종옥의 손에 전해졌다. 땅을 파헤치던 곡괭이가 돌멩이에 부딪칠 때처럼 딱, 하는 소리가 났다. 뺨을 땅에 대고 엎어진 인민군의 눈에서 눈빛이 사라지고 있을 때야 이종옥은 비로소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꽃상여가 지나간다, P-91)
◆ 미군 전투기가 추락한 상감령 계곡 쪽에서 까마귀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화약 냄새에 중독된 까마귀들이었다. 흐린 날은 일찍 저물었다. Y고지, 옅은 구름에 가린 북쪽 봉우리가 쉬이 다가가지 못할 수수께끼 성처럼 유난히 멀어 보이면서도 왠지 으스스했다. 어디선가 절세미인인 그녀, 아무도 본 적 없는 저격수가 총구를 겨누고 있을지도 몰랐다.
(Y고지의 절세미인, P-144)
◆ 이제 중공군의 공격은 취침 전 내무반에서 치르는 점호 같았다. 점호를 치르면 요란하게 소리가 나면서 하루가 지났고, 점호를 치르지 않으면 쥐 죽은 듯 고요해서 하루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중공군이 보이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총을 쏴야 했고, 중공군이 보이지 않으면 보일 때까지 경계 총 자세로 기다려야 했다. 중공군은 보일 때보다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무서웠다.
(중대장이 옳았다, P-166)
◆ 배구공이 공중으로 올랐다. 여학생이 서브를 먹이려 한쪽 팔을 치켜들면서 허리를 젖혔다. 동복을 입고 있었으나 상체가 팽팽해지면서 젖가슴의 양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배구 코트를 둘러싸고 지켜보던 병사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배구공과 함께 여학생들이 뛰어오르거나 착지했다. 가슴과 엉덩이가 동시에 출렁거렸다. 그 모습을 구경하는 병사들의 표정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 여학생들은 공을 받을 때나 보낼 때 가벼운 숨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묘하게도 귀보다 심장에 먼저 닿았다. 여학생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뛰거나 튀어 올랐고, 배구공이 솟아오르는 겨울 하늘은 방금 페인트칠을 끝낸 듯 새파랬다.
(배구 선수, P-176)
◆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기적적으로 혼자 남하한 그는 저체온증과 심한 동상에 걸려 있었다. 추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그 부상병은 파랗게 얼어붙은 입술로 겨우 말했다. 땅이 얼어 참호를 팔 수 없고, 소총이 얼어 방아쇠를 당길 수 없고, 기름이 얼어 탱크나 트럭을 움직일 수 없고, 수통이 얼어 물을 마실 수 없고, 주사기가 얼어 부상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아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중공군은 얼어버린 산과 길을 미끄러지듯 잘도 돌아다니니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었다.
(추운 거리로 내몰렸다, P-186)
◆ 포로가 죽여 달라고 소리칠 때마다 그는 눈을 뭉쳐서 던졌고, 나중에는 가만히 있는데도 던졌다. 두 사람의 늘어난 말수에 놀라면서도 신용수 또한 무언가 지껄였다. 며칠째 계속되는 눈과 기이한 토끼 사냥과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뒤섞인 탓일까. 아니면 확전도 휴전도 아닌 모호한 소강상태를 말단 보병들이 겪어내면서 저도 모르게 생겨난 과민반응일지도 몰랐다.
(토끼 사냥, P-260)
◆ 윤금도는 겨우 편지를 읽었다. 소진호의 편지는 윤금도가 흔히 접한 편지와 확연히 달랐다. 편지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했다. 편지의 수신자인 어머니를 의식하고 쓴 글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안부를 묻거나 전달하는 편지라기보다 독백체의 일기에 가까웠다.
(문학청년, P-279)
◆ 하늘로 날아오르자 발아래에서 벌어지는 참호전이 지옥도地獄圖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사람인지 요괴인지 모를 생명체들이 검은 땅을 파헤쳐 구멍을 내고 길을 낸 곳에서 서로 엉겨 붙어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거기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란 무의미했다.
(내림굿, P-286)
◆ 폭발음이 들리기 직전이었다. 현상염이 유개호로 달려오는 중공군을 향해 돈다발을 홱 뿌렸다. 돈다발이 수류탄 파편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4개국 지폐를 수집한 대한민국 보병 상사 현상염은 그렇게 생을 마쳤다.
(돈폭탄, P-294)
◆ “지지리도 운 없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우리지요. 후세 사람이 혹여 우리를 기록한다면 다 거기서 거기라, 한 사람만 기록해도 열 사람을 기록한 것과 같다고 말할 겁니다.”
“우린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너무 많은 죽음을 보다가 서로 닮아버린 거 같아.”
(창문을 넘다, P-306)
◆ 이건 아니야. 이종옥은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총알이 심장을 꿰뚫었다고 느끼는데도 이상하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니 고통스럽지 않은 게 아니라 항상 고통스러웠기에 고통을 덜 느끼는 것 같았다. 총알이 통과하면서 등허리에 생긴, 더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구멍이 눈에 어른거렸다. 몸이 나른한데 정신은 말짱했다. 그 순간, 놀랍게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수천, 수만의 새파란 나뭇잎들이 오성산 하늘에서 번들거렸다.
(창문을 넘다, P-311)
◆ 윤금도와 김유감은 베이징을 여행하다 우연히 목격한 상감령 전투 홍보영화에 치를 떨었다. 그 분노는 고스란히 문재인 정권을 향했다. 죽을힘으로 휠체어를 굴려 태극기부대를 따라간 청와대 앞에서 두 사람은 손나팔을 입에 대고 소리쳤다.
“어떻게 미국보다 중국을 더 숭배하냐. 이 똥때놈 밑이나 닦을 빨갱이 문재인 놈아!”
(해마다 관광버스는 떠난다, P-323)
◆ 버스 안에서 설핏 잠이 들었는데 저격능선에서 전사한 이종옥이 꿈속에서 보였다. 못 보던 나무가 Y고지로 가는 길목에서 울창한 나뭇잎을 드리운 채 서 있고, 그 아래에 이종옥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나뭇잎은 기름져 보일 정도로 푸른빛이 짙었고, 드러누운 이종옥은 마치 관 속에서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배에 모은 자세였다. 얼굴은 웃음기를 머금어 평온해 보였다. 이상한 꿈이었다. 가끔 먼저 저세상에 간 전우가 꿈속에서 찾아오곤 했지만 이번처럼 기이하기는 처음이었다. 윤금도는 나무를 찾아내려 망원경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않았다.
(해마다 관광버스는 떠난다, P-324)